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대통령자문기구 중 하나인 국가교육회의는 교육부의 의뢰를 받아 지난 4월 16일 ‘대학입시제도 개편 공론화 추진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로드맵에 의해 ‘대입제도개편 특위’,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 등을 구성하고 국민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 드디어 8월 7일 ‘대입제도개편 권고안’을 의결하고 이를 교육부에 송부하기로 했다. 이번 권고안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정시와 수시 특히 학종의 비율변화였다. 현 정부의 수시전형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느꼈던 터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수능을 통한 진학기회의 확대를 점쳤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대입제도개편특위는 수능위주전형의 비율은 정하지 않되, 현행보다 확대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고하는 정도를 제시했다. 이는 바로 시민참여단의 요구가 정시의 확대에 있긴 하나 그 비율이 예상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공론화 위원회가 밝힌 바에 따르면 참여단이 제시한 적정 수능전형비율의 중간값이 39.6%라고 하니 저간의 사정이 짐작이 간다.

그 다음 수능평가방법에 있어서 절대평가와 상대평가의 비율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시각을 끌었다. 그러나 국가교육회의의 권고는 일부 과목에 상대평가유지원칙을 타진하는데 그쳤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국어, 수학, 탐구 선택과목은 상대평가를, 그리고 영어, 한국사는 절대평가를 현행과 같이 유지하는 것이다. 다만 제2외국어/한문 과목은 절대평가를 도입하고, 향후 수능에 통합사회‧통합과학이 추가될 경우, 이 과목들에는 절대평가를 도입할 것을 권고한다는 정도가 변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교육회의의 지난 4개월여 간의 활동에 국민들이 그리 만족스런 눈빛을 보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렇게 말하기에 앞서 이번 대입제도 개편 방안의 형성과정에 참여했던 분들은 국가교육회의 일원이던 시민참여단의 일원이었던 간에 스스로 이 권고안이 진정 대한민국의 대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개혁의 일환이라고 해석하고는 있을까? 교육의 난맥상에 대한 정치적 책임감의 발로로 지극히 민주적인 방법을 통해 선발된 ‘시민참여단’에게 설문조사라는 너무도 민주적인 과정을 점철(點綴)시킴으로 표본집단의 지위를 부여한 것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통계량을 모수(母數)로 추정하는 행위는 학문적 동의를 이미 획득한 것이므로 그 절차적 정당성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대입제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는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그 운용의 형식성이 만든 것들이다.

정시와 수시, 그리고 편입이란 대학입학제도가 지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모양이 비위생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평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수험자, 교육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교육에 대한 인식 자체가 비위생적이기 때문이다. 그 환경적 요소가 병을 유발하고 있을 뿐이다. 대입제도에 대한 논란은 일류대에의 입학이 제도에 따라 다른 집합의 수험생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문, 대학, 인생,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의 구현이 갖는 의미는 절대적으로 더 많고 안정적인 화폐적 수입으로 측정된다는 이 냄새나는 연산(演算)공간에서 자기의 답이 남보다 더 높은 수치가 나올 방정식만을 공식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절차적 정당성이란 형식적 민주주의의 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이미 학문이란 이름을 가질 수 없으며, 그걸 추구하는 곳이 대학이 될 수 없다. 또한 그것들은 반만년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분들의 의도에 부응하지 못할뿐더러, 인간의 존재가치에 단 한 치도 접근하지 못할 어두운 배회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수험생이든 학부모든 교사든 우리 모두가 인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란 단어는 물리적 형상들에게 존재의 가치를 빼앗기지 않는 사람들만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확인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대입제도 쯤이야 큰 노력 없이도 모두가 온정을 가진 마음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평생을 살아도 매일 보는 내 집 앞뜰에 피어있는 풀이름을 모르는 이유는 그 풀이 그 집을 사는 사람의 물리적 공간에는 있되 인식의 공간에는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학문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 이 신세를 모면치 못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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