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적 센스·산악인 뚝심 두루 갖춘 제천의 ‘터줏대감’
‘작은 거인’ 별명에 걸맞는 ‘팔순의 젊은이’… 체구 작아도 언제나 통큰 결단
고향 발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배가 고프다… 고향 위해 여생 바칠것”

사진/ 정광의(사진작가)
사진/ 정광의(사진작가)

 

제천은 충북의 지붕이다. 개마고원이 한반도의 지붕이듯이. 해발 300m 분지가 바로 제천이다. 그래서 제천의 기온은 충북의 평균기온 보다 5도 이상 낮아 추위가 빨리 오고 봄소식도 북쪽에 있는 서울보다 일주일에서 열흘이 늦다. 예로부터 주민의 인성은 주변 지세에 따른다 했다. 소백산맥을 타고 내려와  제천권역에 봉우리를 이뤄 ‘산’의 이름을 얻은 봉우리는 55개. 그 중 해발 1000m 이상의 큰 산 만도 문수봉(1162m)-매두막봉(1100m)-월악산(1097m)백운산(1087m)이 있고, 해발 900m급이 십자봉(984m)-월악산 중봉(980m)-구학산(970m) 등 7곳이나 된다.  일찍부터 유인석柳麟錫(1842~1915)을 위시한 의병들의 활동 근거지가 됐고, 허영호(64), 최종열(60) 같은 세계적인 산악인이 태어나고 자랐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닮은 호걸기상의 사나이들이 많아 누구는 제천을 일러 ‘남성적인 도시’라 했다. 

그런 제천의 터줏대감으로 송만배(82) 충북 북부권포럼 위원장을 꼽는다. 보통사람들의 키보다 몸집은 작은데 해놓은 일이 많고 통 큰 결단을 한다하여 ‘작은 거인’이 란 별명으로 불린다. 제천서 태어나 80평생을 늘 고향의 좋은 일 과 궂은일의 중심에 서 있는 그를 만났다. 폭염행진이 계속되는 8월 초, 제천의 수은주 가 37도를 넘어서는 한낮인데도 양복 차림으 로 약속된 식당의 뙤약볕 마당귀에서 언론계 후배를 맞아주는 에티켓을 보여 주었다. 허물없는 선·후배 사이로 여겨 남방셔츠의 편한 복장으로 달려온 것이, ‘아차’ 싶었다.

-선배님, 한참 만에 뵙는데 키는 그대로신 데요.(웃음)

“그래요? 대기자인 줄 알았더니 눈이 정확 치 않구만. 전엔 158㎝의 등소평 보다 1㎝ 키 가 컸었는데, 요즘 재보니까 155㎝예요. 줄어 들대로 줄어든 키가 80이 넘었는데도 또 줄어 들 게 있다니 원 참…”

-그러나 건강미는 전보다 더 넘치십니다. 얼굴도 더 커지신 것 같고 화색이 더 환해지셨 어요. 여전히 그 보약을 잡수시나보지요?

“그래요. 난 그 이상은 없다고 봐요. 사람에 따라 건강식이 제 각각이지만 내 평생 내 체질 에 맞는 것은 그것이 잘 맞는 것 같아요.”

-건강 관련한 말씀은 뒤로 미루고, 요즘은 어떤 일에 신경을 쓰시는지요.

“점말동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려 는 움직임에 관심을 쏟고 있어요.”

-점말동굴이라면…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에 있는 동굴인데, 수 직 동굴이어서 예로부터 동물들이 한 번 빠지 면 살아 나오지를 못하는 구조지요. 그래서 이 곳서 발굴된 동물의 뼈가 100만 년 전의 것이 라고 미국의 고고학자인 클라크 박사가 연구 발표를 하는 등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동안 잠잠했어요. 그러다 제천 시가 4년여 만에 의림지역사박물관 준공을 앞 두고 있는 요즘 들어 전시물로 점말동굴 유물 을 활용하면 어떻겠는가라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어요. 이와 더불어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던 국보 비신사자석탑이 국립박물관에 가 있는 것을 현지로 되찾아 와야 한다는 의견들 이 강하게 나와 추이를 보고 있지요.”

-신임 이상천 제천시장이 행정에 밝으니 교통정리가 잘 되지 않을까요?

“공직자들이 보는 시각과 전문가가 보는 시 각, 그리고 시민들의 시각을 종합하여 행정 책 임자인 시장이 결정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공직자들은 낯선 일이 나 모험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DNA유전 인자가 있어서 우리 같은 이들이 어드바이스 (조언)를 해야 해요. 그러나 자칫하면 공직자들 의 영역을 넘나드는 게 되고, 어? 하다 보면 타 이밍을 놓지고… 민간인 신분의 충고란 것이 엉 뚱한 오해도 받을 수 있어 생각보다 어렵지요.”

-많은 시민들에게 전 동명초 부지가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가 큰 관심사던데요.

“제천 시내 한복판에 있는 5200여 평(1만 7251㎡)의 공지 활용은 제천 시내가 공동화현 상을 가져오느냐 탈 공동화로 제천 발전의 동 력이 되느냐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어서 관심들이 클 수밖에 없어요. 한 때는 컨벤션센 터를 구상하기도 했고 요즘엔 세명대 캠퍼스 화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도 한데 신임 시장의 공약에 명시되어 있기도 하여 임기 4년 내에 사업이 시작돼 끝이 날 것으로는 봅니다. 공동화를 막기 위해선 대학 캠퍼스 유치가 타 당하고 유력할 것으로 봅니다.”

-근래 특별히 관심을 갖고 추진하시는 일이 또 있으시죠?

“알다시피 나는 내 고향 제천에서 문화원장 12년에 제천시문화예술위원장을 4년간 했어 요. 그리고 이어서 충북도북부권포럼 위원장 을 현재까지 맡고 있어요. 나이가 들었음에도 쉬지 않고 지역 일을 맡아서 하는 까닭은 언론 계를 떠난 이후의 공공단체장이라는 자리는 급여를 받지 않는 명예직인데다 나이 탓에 세 상물리도 좀 알고, 먹고 살 수는 있으니 소신은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원장 재임 중에 문화원의 신축이전 등도 과감하게 추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 대가 바뀌고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 다양화 되고 욕구도 가속화됩니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야 한다는 데 의견 들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제천 문화재단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 다.”

-이미 다른 곳에는 있지 않습니까?

“청주나 충주는 이미 설립되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 단위에는 다 있을 것 으로 압니다. 그러나 제천시의 재정이 그리 넉넉한 게 아닐 것이어서 여러 방면으로 연구를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제천산악회장-박달재노래비건립추진위 원장-제천의병제추진위원장-국제음악영화 제조직위원  등을 맡아 지역의 특성이나 문화 적인 고양高揚에 늘 앞장서고 계신 것은 아는 데, 혹시나 ‘감투’욕심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지 는 않을까요?

“오해를 받기도 하지요. 자칫 ‘노욕老慾이 아 니냐’ 라거나 ‘제천에 송만배 밖에 없느냐’ 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민간단 체나 행사추진을 위한 책임자는 무보수의 명 예직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고사固辭하 는 바람에 책임자를 선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나의 경우는 고향을 위한 일이라면 내 돈을 쓰고 많은 시간을 내어서라도 정열을 쏟아 좋은 결과를 얻고 싶지요. 제천을 위해서는 ‘늘 배가 고픈’ 상태가 기쁨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일이 맡겨지면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여건 만 마련되면 언제나 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체력과 용기와 의욕의 출발점은 언제 부터인지요.

“제천서 태어나 초·중·고를 다니고 서울 서 대학 생활을 한 후 줄곧 고향에서 신문과 방 송 기자로 활동하면서 깨우친 것은 어머니 품 속 같은 고향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초등학 교 때 남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피겨 스케이트 를 탔고, 중학교 땐 권투를 했어요. 고등학교 에 다니면서 비로소 금수산 등을 오르내리며 산악인의 기초인 체력과 담력을 키우기 시작 했지요. 그 이후 제천산악회를 만들어 22년간 알피니스트로 소양을 쌓고 후배들을 키웠어 요. 다행스럽게도 허영호나 최종열 같은 세계 적인 산악인이 나와 산사나이의 보람을 느꼈 지요.”

-산은 늘 위험과 감동을 함께 지닌 곳이지요?

“맞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 어요. 1980년 10월, 당시 26살의 한창 물이 오 른  산악인 허영호를 데리고 히말라야 마나슬 루(8125m) 등정을 했어요. 2명의 셀파와 함께 가던 중 나는 6200고지의 베이스캠프에서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앞서 가 던 허 대원이 7000고지 쯤에서 크레파 스(눈이나 얼음이 갈라진 틈)에 빠졌다 는 셀파의 다급한 무전보고가 들어 왔 어요. 하늘이 노랗게 보였어요. 고향 후배 끌고 와서 눈 속에 묻는다는 아 찔한 생각이 들자 그 셀파에게 황급 하게 제안을 했어요. 500달러의 사 례금을 줄 테니 어떻게 하든지 구해 내라고. 그들에게 지금부터 38년 전의 500달러는 참으로 큰 돈 이었어요. 구명자일을 내리 는 등 구조작업 3시간 30분 만 에 허 대원이 ‘대장님, 살아 나 왔습니다’라는 짤막한 무전보 고를 해왔던 순간의 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절 망의 시간을 딛고 일어 나 마치 천상에서 들 리는 듯했던 허 대원의 ‘살아 나왔다’는 목소리에 함께 담겨 울리 던 그 환희의 음향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 다.”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허영호씨가 그런 죽음의 찰나를 딛고 일 어서서 끝내는 지구의 최고봉 에베레스트 (8848m) 정상에 서게 됐군요. 그때 등정비용 은 얼마나 들었는지요.

“사비 6000여만 원 정도가 들었는데 카투만 두에 내려오니 셀파 사례금도 부족하여 집에 서 급하게 3000만원을 송금 받아 약속한 돈과 그들의 소원인 청바지와 티셔츠를 사서 주었 어요. 그때 새삼 느낀 일이지만 삶과 죽음은 찰 나라는 것, 살아있음 만으로도 큰 축복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지요.”

-다시 가보고 싶은 산이 있는지요.

“20년 전에 갔었던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를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적도에서 가까운 곳 의 높푸른 하늘과 끝없이 이어지는 야생화들 의 반김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을 하시면서 잊혀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인데요.

“한국산악회를 창설하신 노산 이은상 (1903~1982) 선생님과 ‘울고넘는 박달재’를 작사하신 반야월(본명 진방남·1917~2012) 선생이 그립습니다. 한국 시조시단의 태두泰 斗 노산 이은상 선생은 한국산악회 창설 이후 생긴 제천산악회에 애정을 쏟아 주시면서 여 러 일을 하는데 자상하시고 바른 자세를 갖도 록 소양을 키워 주셨지요. 한국산악회를 이끄 는데 귀감이 되신 분입니다. 반야월 선생은 박 달재에 노래비를 세울 때 건립추진위원장으로 만나 뵈었지요. 이 노래비 준공 3개월 만에 ‘울 고넘는 박달재’의 가수 박재홍씨가 별세를 합 니다. 반야월 선생은 제천을 몇 번 오시면서 마 치 고향후배를 보시듯 정답게 하셨어요. 이 노 래비에 박달재의 유래를 써주신 천재 언론인 천관우(1925~1991·제천 청풍 출생) 선생의 귀한 뜻도 새기고 있습니다. 언론계에서는 지 난 2월에 별세하신 조용중(1930~2018·경향 신문, MBC 전무, 전 연합통신 사장) 선생의 이 름이 가슴에 남습니다.”

-80대에 들어서면서 후배들에게나 주변 사 람들에게 일러주실 말씀이 있다면…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나이가 들어 가면서 느끼는 것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2년 전 쯤, 호 주에 가 있는 둘째 아들(준석·40· 사업)이 일을 저질렀어요. 골프장 부 근에 차를 세워 놓았는데 술이 취한 채 골프를 치러왔던 호주인이 자기 차에 대고 소변을 보더래요. 이로 인 해 옥신각신 하다가 힘이 달리자 트렁크에 있던 골프채를 꺼내 호주인을 때린 거예요. 이 사 고로 아들은 한 달간 감옥에 갔고 치료비와 위자료 등 합 의금으로 수억이 날아갔어요. 그런데 수 년 전만해도 그 큰 돈을 물어 준 것이 억울하여 자식 놈을 원망했을 텐데 그 보단 그 호주인에게 아들아이가 골프채로 맞아서 입원해 있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요. 난 평소 ‘아들바보’가 아니었는데도 어떻게 금방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게 됐고, 돈 보단 무 시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한국 남아의 기개 를 보인 아들이 밉지 않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내가 인생 80을 넘기면서 비로소 돈보다 더 귀 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더 소중한지의 분별 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예를 들었지 만, 내 주변의 사람들과 선·후배의 고마움, 그 리고 고향의 훈훈함에 대한 감사함을 늘 일깨 우면서 남은 생을 살아가려 합니다.”

-참 진한 감동이 오네요. 저도 그쯤에 이르 면 그만한 분별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 랫동안 키워 오신 세운가스 회사는 잘되고 있 지요?

“이제 40년이 되었어요. 갈수록 수요는 다소 줄고 있으나 노후를 사는 데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아내(박순애·74)가 고 생을 많이 해 줬고, 큰 아들(준호·51·서강대 교수)이 신경을 써주고 있지요. 모든 사업이 다 어려움을 겪는 마당에 그나마 일찍 시작해서 안정감을 갖고 있는 것이 큰 위안이 되지요.”

-앞서 말씀 나누던 그 보약(?)이 건강비결이 신가요? 보약 이름을 뭐라 해야 하지요?

“꼭 그렇다고는 보지 않지만, 나의 경우는 젊 은 시절부터 이제까지 기회가 되는대로 먹고 있는데 기운을 유지하는 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약 이름에 혐오감을 느낄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좀 망설여지기는 하는데 일반적 으로 ‘뱀탕’이니 ‘사탕’蛇湯이라고들 합니다. 전 문으로 하는 곳에 가야 먹을 수 있지요. 80이 넘으니 이제 격한 운동이나 산에 오르는 일이 버거워서 가까운 사찰을 다니면서 지루하지 않게 걷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산사를 찾는 일이 즐거움 중의 하나 이기도 합니다.”

-혹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후회하지 말자’입니다. 지나온 일이나 결정 한 일에 후회 하지 않으려 노력을 하지요. 그러 다 보니 그것이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지름길 인 듯도 해요.”

-현재 서 있는,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에 서 서’ 뒤도 돌아보고 앞도 내다보는 혜안을 살피 고자 만든 것이 이 지면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전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나는 한 생애를 거의 지나 왔습니다. 남은 생애가 얼마가 되든 내 소신대로 주변사람들 과 고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고자 합니다. 충북의 북단에 위치한 제천과 단양은 그동안 여러 가지로 소외되는 듯한 섭섭함을 느껴 왔 습니다. 문화-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대에 낙후되지 않도록 도정관계자 여러분들 이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제 천·단양의 지도층 인사부터 주민 모두가 고 구려 남아의 기상과 자부심으로 무장되었으 면 합니다. 의병의 후예들이 지니는 나라와 지 역을 위한 첨병이 되고자 하면 되고야 말 것입 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손잡고 ‘우리 고향 만세-’를 합창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한 날이 일찍 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긴 시간 고맙습니다.

■ 동양일보 회장·시인

■ 송만배宋晩培 위원장은…
* 1936년 충북 제천시 명동 출생
* 제천농고. 동국대 2년 수료
* 1964년~1980년 경향신문 기자
* 1980년~ 1995년 충주문화방송 보도부 차장  부장-보도국장
* 제천산악회장. 박달재노래비건립추진위원장  제천의병제추진위원장 등
* 1999년~2011년 제천문화원장
* 2011년~2015년 제천시문화예술위원장
* 2016년  충북도북부권개발포럼위원장(현)  제천시국제협력위원장(현)  ㈜세운가스 대표(현)
*충북 제천시 청전동 159-27. 이메일: saewoon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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