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꿈길 따라 동네 한바퀴 인문정신으로 가득한 고즈넉한 풍경

한운사 기념관

(동양일보) '구름이면 좋겠어. 올 여름은 너무 질기고 뜨거웠어. 도시의 풍경도 숲들도 숨이 막히고 기진해 있으니 보석같은 단비를 몰고 올 구름이면 좋겠어. 산들바람이면 좋겠어. 고단한 하루, 갈피없는 나그네의 진한 땀방울 식혀주는, 사랑하는 내 님과 함께 찾아오는 산들바람이면 좋겠어.

꽃이 되면 더욱 좋겠어. 자신의 몸무게보다 몇 백배 더 무거운 흙을 비집고 일어나 옥문을 여는 맑고 향기로운 그 처녀성의 신비가 온 세상에 젖고 스미며 물드니 꽃이 되면 좋겠어. 밤하늘에 빛나는 별, 고향의 뒷산을 지키는 참나무, 늘 푸르고 향기 진한 소나무, 골 깊은 계곡의 맑은 옹달샘이 되면 근본없는 사내의 삶이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야겠어. 몸과 마음에 세상의 풍경이 깃들고 그 풍경 속에서 앙가슴 뛰는 순정의 날개짓, 희망의 춤과 노래를 부르는 새가 되어야겠어. 목공의 귀재는 나무를 깎아 새를 만들어 하늘로 날려 보낸다고 했던가. 새가 날면 함께 웃고 새가 울면 함께 우는, 다시 축복이 기적처럼 다가오니 오늘 하루도 풍경처럼 깃들면 좋겠어….'

청안동헌 관아로 사용됐던 안민헌
청안동헌 관아로 사용됐던 안민헌

굳게 다문 입술을 비집고 마음의 것들이 하나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근본없는 사내가 삶에 지쳤기 때문이고, 여려진 마음속으로 낮고 느린 풍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여기는 괴산군 청안면소재지다. 세종대왕은 1444년 두 차례에 걸쳐 인근의 초정약수터에 행궁을 짓고 요양을 하며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한글창제를 마무리하고 조세법을 개정했으며, 우리 음악을 만들고 노인잔치를 베풀며 인재양성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식배양, 인재양성, 시스템이라는 세종의 통치철학도 이 때 만들어졌다.

이 중 조세법 개정을 주목해야 한다. 탐관오리의 횡포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세금 거둬들이는 방식을 전면 개혁키로 하고 국민투표를 단행했다. “전국의 여염집 백성까지 모두 찾아가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물어라.” 찬성의견이 높게 나오자 토질의 비옥함의 정도에 따라,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식을 달리했다.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청안 땅에서 이를 시범 도입하고 당신께서 직접 확인했다. 조세법의 성지요, 세종의 꿈을 펼친 곳이다.

청안향교 대성전
청안향교 대성전

청안향교와 사마소가 역사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의 학문기관으로 서울에는 성균관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민간에서는 서원과 서당이 운영되었다. 청안향교는 조선시대부터 인재를 양성하고 지식을 배양하는 곳이었다. 사마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에 설립한 정치와 행정의 협력기관이었다. 관아 인근에 자리잡고 생원과 진사의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을 장려하며 정치토론과 교육활동을 전개한 곳이다. 지역의 대소사를 두루 살피고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함께 모여 마음을 다듬고 큰 뜻을 펼쳤다.

이 고장 출신 극작가 한운사는 세종의 자랑스런 후예다. 드라마 작가로, 영화감독으로, 심쿵거리는 노래의 작사가로 근대 한국 문화계의 한 획을 긋지 않았던가.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그는 우리에게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며 추억이 되었던 노래들을 만들었다. 한운사기념관에는 색 바랜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 그의 꿈과 인문정신이 깃들어 있다. “한 가닥 구름 이는 것이 태어남이요, 한 가닥 구름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그의 마지막 언어에 가슴이 시리다.

천연기념물 제165호 은행나무는 이곳에서 천 년을 지켜오며 생명을 찬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용문사의 천 백년 된 은행나무를 비롯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19그루 있다. 씨를 심어 손자를 볼 나이가 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정도로 모진 풍파와 시간의 아픔을 견뎌야 한다. 빠르게 가지 않고 가볍게 보지 않는다. 동네의 이런저런 이야기 함부로 누설하지 않는다. 푸른 잎으로, 노란 풍경으로, 구순한 그 맛으로 대신할 뿐이다.

여름의 끝자락, 마을 풍경이 눈부시게 빛난다. 세종의 어짊과 창조적 가치와 유교의 올곧은 정신, 그리고 한운사의 인문 콘텐츠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무엇을 할 것인지 엄연해 진다.

청안시비
청안시비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사진작가, 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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