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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 노년철학 2회 국제회의 한·일간의 노인상(老人像) 대비 - 새로운 노인상을 찾는다
동양포럼 / 노년철학 2회 국제회의 한·일간의 노인상(老人像) 대비 - 새로운 노인상을 찾는다
  • 박장미
  • 승인 2018.08.26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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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최시형의 삶과 사상– 바람직한 노인상의 정립 /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노년기 최시형의 삶과 사상– 바람직한 노인상의 정립 /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21세기의 바람직한 노인상의 정립을 위해 노년기 해월신사의 삶과 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21세기의 우리나라 사회는 정보화, 세계화, 개방화라는 과제를 갖고 세계시민과 더불어 경쟁하는 나라가 돼 가고 있다. 사회적 변화로서 21세기는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가 돼 가고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고도의 정보화 사회로 바뀌어 간다. 국내적으로 남북통일의 과제를 갖고 있고 산업사회에서 강조됐던 대량생산의 효율성에서 비롯한 획일주의,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개성을 추구하면서 전문성을 다양하게 인정하는 전문화 사회가 돼 가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할수록 보건의료에 대한 욕구와 복지사업에 대한 요구는 증대하는 추세이다.

바람직한 노인상의 정립을 위해 우리는 동학의 2세 교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영도자,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조선조 조정으로부터 세 번이나 집중적 지명수배를 받은 인물이다. 또한 36년간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어우러지는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산간 마을 50여 군데를 전전하며 살아갔다. 산간을 전전하는 해월신사는 한 생애를 걸쳐 분노와 좌절을 쌓아 가는 대신, 다시 개벽의 미래공창으로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몸소 그것을 구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스승의 모습을, 해월신사 최시형을 통해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1864년 3월 10일,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대구참형은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결과였지만, 그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고 도통을 계승한 해월신사를 통해 부활해 새로운 불씨를 지펴나갔다. 태백산맥 오지의 험난함이 어우러진 산간마을, 용화동에서 해월은 동학 재건을 위한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오장(五臟)이 있으므로 정욕(情慾)이 있다.’라고 고백했듯이, 해월신사는 자신의 욕망을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한울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며, 정욕에 매달리면 한울님을 공경하는 데서 멀어지기에 스스로를 도력으로 다스리며 올바른 수행자 길을 걸어 나갔다.

1875년 10월 18일, 해월이 펼친 ‘용시용활(用時用活)’의 설법은 ‘때를 살려서 쓸 것’을 강조한 가르침으로 삶 속에서 도를 실천하는 바탕이자 때를 기다리는 지혜의 원천이 됐다. 해월신사는 1864년, 대신사(大神師)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가 순도하자 관의 지목을 받았다. 1871년, 신미교조신원운동을 비롯해 1892년, 공주와 삼례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으며, 1893년 광화문 앞 교조신원운동을 이끌고, 보은과 원평에서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을 전개했다. 1894년 동학혁명운동을 지도하면서 근대사회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54세인 1880년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와 ‘동경대전’, 56세의 1881년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93년 동학의 단위조직에 해당하는 포(包) 제도를 공식화했고 의례행사를 새로이 정비했다. 해월신사는 1827년 3월 21일(양력 4월 16일)에 외가,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모친은 병으로 돌아가고 영일 정씨를 계모로 섬겼다. 해월신사 이름은 경상(慶翔)이며 자는 경오(敬悟)지만 시형(時亨)으로 고쳤으며 호는 해월(海月)이다.

해월이 68세인 1894년 1월, 동학농민 운동으로 무력투쟁을 전개하고, 1897년, 손병희(孫秉熙, 1861~1921)에게 도통을 전수했으며, 1897년, 이천시 설성 수산리와 여주 강천 도전리 등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72세인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교수형에 처했다. 1907년, 9년의 세월이 흐르자 고종 특지(特旨)로 신원(伸冤)이 이루어졌다.

신사의 인생행로가 고달픔의 연속이었지만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구도자의 삶을 유지했기에 자발적으로 양생(養生)하는 노인상의 귀감(龜鑑)이 된다. 해월은 34년 동안을 봇짐 하나로 이 동네 저 동네,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숨어 다니며 포교하고 동학을 이끌었다. 36세부터 도피생활이 시작돼 72세, 원주 호저면 송골에서 관헌에게 체포될 때까지 36년 동안 보따리 하나 가지고 노년기를 보냈으니 안식을 취할 겨를조차 없었다. 해월신사께서 36년 동안 도망 다니면서 숨었던 장소는 200군데로 추정되고 있다. 숨어 지내지만 뜻을 펼친 인생항로는 미륵산의 사자암, 마곡사 가섭암, 영월 적조암·직동, 영양 일월산 용화동, 단양 영춘면 노루목, 여주 전거론, 이천의 앵산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포된 원주 송골 등 다양하다.

피신처마다 하룻밤 머물기도 하고, 이삼일도 있었고, 상황이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반년도 머물렀다. 항상 휴대하던 보따리 안에는 스승의 유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필사본 그리고 짚신이 여러 켤레 들어 있었다. 피신처에서 해월은 꽃과 나무를 부지런히 심었다고 한다. 송골에서 체포되기 전날에도 새끼 꼬는 일을 계속했다. 숨 막히는 도피생활을 영위하며 노년기를 보냈으니 해월신사는 자강불식(自强不息)으로 스스로 기운을 재충전했다. 해월신사의 묘는 원적산(圓寂山) 천덕봉(天德峰, 630m)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사형집행 후 가매장된 시신을 교도 이종훈(李鍾勳, 1855~1931)등이 수습해 여기에 안치했다고 한다.

여러 번 꿈에서 수운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해월신사는 자신의 활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미래공창의 다짐을 키워나갔다. 동학 도인들의 경제적 부담을 목격하면서 해월은 의례를 간소화하고 제례명칭도 ‘소인등제(小引燈祭)’로 고쳤다. 의례에 사용한 생쌀은 밥이나 떡을 지어 먹었고, 무명은 옷감으로 사용됐다. 점차로 동학의례에서 제물은 사라지고 청수 한 그릇만 남았다. 여러 차례 의례를 바꾸고 간소화한 것은 백성과 함께하려는 그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인등제’의 보급으로 신앙심의 진작시키면서 해가 진 밤중에 행했으며 장독대처럼 단(壇)이 있는 곳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879년, 가을에 이르러 도원(道源)을 잇겠다는 뜻이 확립되면서, 수운의 행적을 정리하고자 ‘도원기서’ 편찬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책이 발간되자 굳게 봉한 후 날인해 정선군 유시헌에게 맡기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는 해월신사의 활동과 도인들의 이름들이 상세히 적혀있는 도원기서를 관가에서 입수하게 되면 큰 곤경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는 공개할 수 없었다. 특히 해월신사는 자신이 믿을 만한 인물인 도접주, 유시헌에게 맡겼다. 이렇게 봉인됐던 도원기서는 저술된 지 100년만인 1978년에 세상에 공개됐다. 이를 통해 구전에 의존했던 초창기의 동학 성립과정을 밝힐 수 있는 근대사상사의 주요자료가 형성됐다.

1894년, 전북 고부의 접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도 동참하고 지지를 표하며 활동했다. 이듬해 전봉준이 체포돼 사형언도를 받자, 충남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해 공주에서 교전했지만 참패하고, 전북 장수전투에서도 참패했다. 1898년, 강원도 원주에 머물던 중 반역 죄목으로 체포됐다. 이때 해월신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자는 고부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이처럼 해월신사의 노년기는 지목을 피해 도피하는 고난 속에서 스승의 유훈을 방방곡곡 퍼뜨리며 동학조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집약한 사상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이다. 누구나 한울님을 모셨으니 사람을 한울님처럼 잘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집에 손님이 오거든 손님이 오셨다 하지 말고, 한울님이 내 집에 오셨다고 말하십시오. 부인 동덕들은 함부로 아이들 때리지 마십시오.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입니다.'라는 법설을 남긴 해월신사는 타인용서와 자기성찰을 함께 강조하면서, 모심과 섬김 그리고 존중과 배려를 실천했다.

'교만하고 자기를 과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은 진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진실해야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라도 선하게 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르면 그도 반드시 스스로 바르게 됩니다. 사람과 물건을 대할 때 악한 것은 숨겨주고 좋은 것은 드러나게 하십시오. 저 사람이 나에게 포악하게 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과 용서로 대하고, 그가 나에게 거짓으로 말을 꾸며도 나는 정직하고 순수하게 대하면 자연히 마음이 돌아오게 됩니다.'라고 설파했다.

또한 해월은 사람과 한울님의 공경과 함께 물건마다 하늘이고 일마다 하늘이라는 관점에서 천지인삼재를 모두 공경하자는 삼경(三敬) 사상으로 생태계 살림의 중요성을 선구적으로 가르쳤다. '세상 만물 중에서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이것을 알면 생명 있는 것을 죽이는 일은 굳이 금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하지 않게 됩니다. 제비의 알을 깨지 않아야 봉황이 날아오고 풀과 나무의 어린 싹을 꺾지 않아야 산이 무성해집니다. 쓸모가 다해 못 쓰게 된 물건이라며 함부로 버리고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날아다니는 3000종의 새도 다 자기 부류가 있고, 땅을 기어 다니는 3000종의 벌레도 다 자기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과 생명을 공경하십시오.'라고도 설파했다.

이러한 삼경(三敬)의 사상과 법설은 먼저 나를 변화시켜 우리를 바꾸자는 것이며, 생명운동과 평화운동 구리고 노동운동이었다. 여성과 노인 그리고 어린이 존중 법설은 오늘날에도 세대상생의 시대과제를 해결하는 귀감이 되는 가르침이다. 해월을 따르는 어느 제자가 물었다. “사람의 도 닦는 것이 마음 닦기를 주로 합니다. 마음을 닦는 데는 재난과 고통이 많으므로 능히 마음을 닦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닦는 것이 옳습니까?” 이에 해월신사는 동학의 창도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수심정기(守心正氣)’로 응답했다. ‘수심정기’는 동학공부의 방법이다. ‘수심(守心)’은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며, 내 몸에 모셔져 있는 한울님을 체험하면서, 한울님께 받은 본래 마음을 회복하고, 영성을 회복한 마음을 지키고 살리는 영성운동이었다.

해월신사는 한울님 마음을 회복해 당신의 몸에 모신 한울님을 만나는 영성체험을 하고서 비로소 모든 의심을 떨쳤다. 그리고 스승께서 한평생 한울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의 ‘경외지심(敬畏之心)’이었다. 이를 계승함으로, 비록 노년기에 처해서도 해월신사는 이 자세를 경건하게 유지했다. 수심정기의 깨달음과 실천으로 노인존엄을 지속한 경로의 실천이다. “어떻게 닦는 것이 옳습니까?”는 물음에 대해 해월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생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괴롭고 어려운 일 아닌 것이 없고, 즐거움으로 생각하면 편안하고 즐거운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고생이 있을 때는 도리어 안락한 곳을 생각할 것입니다. 만사의 성취는 정성에 달려 있습니다. 정성을 지극히 하는 마음에는 즐겁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결국 바람직한 노년상의 요소로서는 고생할지라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영성자각이 필수적이라고 할 것이다.

해월신사가 사형에 처한 이유는 ‘주문’과 ‘부적’ 때문이었다. 동학혁명 이후 고부 군수 조병갑은 판사로서 해월신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에서 언급한 ‘주문’은 동학의 21자 ‘주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였으며, ‘부적’은 영부(靈符)의 신령스런 만다라였다. 동학의 창도자 수운선생이 득도한 후 제자들에게 가르친 수행과목은 주문과 영부가 전부였다. 영부를 그려 불에 태워 물에 타 마시는 그 사람의 정성에 따라 병이 낫기도 하지만 차도가 없는 경우도 나타났다. 영부는 마음을 형상화한 만다라로 정성의 집약이었다.

동학의 핵심은 평등의식을 고취하는 영성의 알아차림이다. 불평등한 신분 질서가 강하게 뿌리내렸던 조선 사회에서 동학은 무엇보다도 평등을 중시했다. 양반과 상놈,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평등을 중시했다. ‘모든 사람이 하늘’이라는 영성의 알아차림이 평등의식의 구현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공감대를 나타내며 참여했다.

동학의 또 다른 핵심은 자주의식을 고취하는 영성구현이다. 서양과 일본에 대한 자주의식도 내포한다. 나라 사이의 자주의식은 외세에 대한 평등이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동학군을 이길 수 없었던 조선정부는 청군을 불러들였고 일본군도 이 땅에 발을 들여놓는 게기가 됐다. 한반도는 청일전쟁으로 몸살을 앓았고 중국을 이긴 일본군은 조선을 삼키려 했다. 그해 가을, 추수를 끝낸 동학군은 침략에 항거해 전국 각지에서 죽창 들고 일어났다. 신분차별의 철폐를 외치며 평등을 요구한 동학군에 우호적이던 유림 선비 세력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권력 유지에 관심이 있었던 임금과 조선정부에 항거해 동학군은 외롭게 싸웠다. 동학혁명의 좌절을 겪은 10여 년 후, 조선 왕조는 멸망했다.

동학혁명 당시 여성도 다수 참여했다. 관작리 전투에서는 관군의 밥을 해주던 노파가 농민군에 내응해 관군이 잠든 사이에 포신에 물을 붓고 도망쳤다. 관군은 대포를 쏠 수가 없었다. ‘동학군은 비바람을 부르고 신비한 술수가 있어 능히 대포 구멍에 물이 나게 한다.’는 소문이 그 주변으로 떠돌았다. 동학군이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의 이면에는 이름 없는 여성들의 헌신이 있었다. 해월신사의 저술, ‘내수도문·내칙(內修道文·內則)’을 통해 해월신사의 여성존중 사상을 살필 수 있다. 당시 아무도 비참한 여성의 삶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1890년 해월신사는 수도의 근본이 여성에게 있음을 깨닫고 여성이 수도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해월은 생활이 내 몸에 모신 한울을 길러내는, 양천주(養天主)의 과정임을 깨닫고 '일상의 성화(聖化)'를 통해, 세상이 개벽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일상의 힘이 여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성은 생명잉태의 포태(胞胎)로서 새 인간, 한울을 길러내는 바탕으로서 주요의미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당시 여성들은 남존여비에 사로잡혀 자기비하 의식에 내몰렸다. 노동력의 착취로 말미암아 여성은 노예의 삶을 영위했다. 해월신사는 「내수도문·내칙」을 통해 당시 여성들에게 여성도 한울님을 모신 한울과 같은 평등한 존재이며, 일상생활의 수도와 포태를 통해 한울을 길러내는 위대한 존재임을 각성해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했다. 전통태교와 달리, 해월신사는 여성과 태아를 한울로 존중했다.

포태를 양천주의 시작으로 파악해 포태한 여성은 새 인간이자 한울을 이 땅에 출산하는 막중한 책임의식과 함께, 스스로 '태교' 수도를 거쳐 ‘양천주의 당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설파했다. 해월의 여성존중은 농민운동 당시의 '폐정 개혁안'에 드러났고, 여성 농민 운동가, '이소사(李召史)'의 활약으로 입증됐다. 이는 '이종일'의 여성개화운동, 천도교 여성운동으로 이어졌다. 해월의 ‘여성존중’ 사상은 여성의 상품화에 경종을 울리면서, 양천주사상에 입각한 잉태가치를 천명함으로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에도 생명력을 발휘한다.

해월신사는 노인철학의 방향을 암시함으로 바람직한 노인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국가중심의 경로실천이다. 공적 차원의 경로실천은 노인존엄의 평등의식을 고취한다. 성차별 못지않게 심각한 연령차별을 제도적으로 철폐시킨다. 사회에 기여하는 노인들에게 정년추방의 문제는 평등의식 구현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시민사회와 연대하는 양로방안이다. 세대상생을 이루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공공부조를 성취토록 한다. 혐로(嫌老) 분위기를 양노(養老)의 공감대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노인 스스로 자주의식을 고취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양생실천을 생활화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노인 스스로 양생을 실천하는 자주의식 고취는 바닥난 노인재정을 재충전시키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조선정부가 그를 떠돌이의 신세로 전락시켜 감시했지만, 해월신사는 혐오정책에 굴하지 않고 ‘스승을 보은하는 삶’, ‘양천주로 양생하는 삶’, ‘보은 장내리를 개벽 요람으로 살리는 삶’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했기에, 영성모심과 사람 섬김 그리고 생명살림의 주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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