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590년 3월 6일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이 결정되었다.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기록관(記錄官) 허성 등을 포함해서 약 200여명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일본의 전쟁수행 의지와 능력에 대한 정탐 활동이었다. 드디어 통신사가 1591년 1월 28일 돌아오게 된다. 정탐내용에 대한 귀국보고회가 조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 희대의 국정농단 사건이 벌어진다. 통신사 단장인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부단장인 김성일은 '신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은 공연히 인심을 현혹하고 있습니다.'라고 반대 의견을 트며 조선 조정을 농단하기 시작하였다.

김성일은 사림파의 일원으로 평소 혁신사상을 내세우며, 훈구파의 정책에 태클을 걸며, 보수파 궤멸에 앞장 서온 사람이었다. 명분을 칼같이 내세워 상대 정치인을 제압하는 기교에 능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허성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황윤길의 의견이 옳다 하였다. 아마 ‘당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어 출당 조치’될 것도 각오했을 터였다. 당시 기록관(서장관)은 부사보다는 하위직이지만 행대어사(行臺御史, 움직이는 사헌부)를 겸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허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 직분을 옳게 수행한 것이다. 우리는 칠흑의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듯, 16세기 조선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한 정치인의 옳 곧은 정치윤리와 지성의 결기를 확인하고 있은 것이다. 당시 조헌 선생과 상당수의 중신들이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하였으나, 혁신사상을 내세워 집권했던 당시 여당은 바윗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사신이나 왜인들이 조선 땅으로 들어오는 발을 모두 끊었다. 부산포의 왜인 상인조차 모두 철수하고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으나, 당시 집권당은 이 전쟁의 징후를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였고, 파악하려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치려고 땅을 빌려달라며 일본이 협박을 섞어가며 애걸복걸하였는데, 왜 당시 집권당은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카 (小西行長:소서행장)가 선두가 되어 16만 7,900명의 왜병이 조선을 침략한다. 전쟁 발발 20일 만인, 5월 2일 조선은 수도 한양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상대 정치인을 궤멸시키려고 밤새 묘책을 세우던 정치인들은 왜군 궤멸을 위한 묘책은 고사하고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4월 30일 선조의 행렬이 홍제원(洪濟院)에 도착했을 때, 군신들은 100명이 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선조는 전후 훈공서열을 정할 때, 자신을 끝까지 따르면 내관을 이순신 장군보다도 앞에 놓았다.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6월이 되어 고니시가 평양성을 함락하자,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에 내부(內附)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약속은 고사하고 아예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임금이 한 발짝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닙니다(朝鮮非俄有也)”라며 선조의 명나라 망명을 극구 제지하였다.

명나라는 7년의 조일전쟁 기간에 4년이나 휴전상태를 유지하면서 일본과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했다. 이 논의 과정에서 조선은 패싱(passing) 당하고 있었다. 일본은 명나라에게 조선 8도 중 4개도의 분할을 제의하였고, 명은 조선을 직할통치 하려고 들었다. 만약에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했으면, 명나라의 협상조건이 유리하게 작용되어 조선은 명나라가 직할하는 어두운 식민시대를 맞게 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우리는 더 이상 명나라의 입술도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위급할 때는, 신하의 옳 곧은 충언이 항시 필요한 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정치인의 지성의 결기가 필요한 때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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