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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실
기고/ 마실
  • 장은겸
  • 승인 2018.08.2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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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겸 청주시 청원보건소 영하보건진료소장

 

(동양일보) 바지춤이 내려와 엉덩이 골이 다 보이는 차림새로 유모차를 밀면서 들어서는 어르신이 활짝 웃으신다. 진료소 옆집에 사는 분이다. 본인도 아신다. 부끄럽다는 걸. 하지만 팔이 아파 옷을 올릴 수 없음을 알기에 올려드리고 의자에 앉혀드렸다. 온종일 사람 구경을 못해 진료소라도 오면 입이라도 열어 볼까 싶어 오셨단다. 걸어서 서른 발짝 남짓인데 숨이 턱에 차 하신다. 힘들게 오신 데다 워낙 커피를 좋아 하는 분이라 믹스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 더 넣어 드렸더니 달게 드신다. 호로록 호로록 목 넘기는 소리가 참 맛있다.

한 숨 돌린 어르신께서 “옆집으로 쌀을 꾸러 다녔어도 아이 키우며 살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라며 말문을 여신다. 다섯 자식 중 셋째 딸이 너무 고맙단다. 지금도 자주 찾아와서 잠자리를 살피고 냉장고에 먹을거리도 넉넉하게 채워주는 자상한 딸이라고 한다. 없는 살림이라 대학을 못 보내고 공장을 보냈단다. 모은 월급으로 엄마 장롱이 낡았다며 자개농으로 바꿔줄 만큼 정이 많은 딸이 결혼 실패로 혼자 살아가는 걸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며 안타까워하신다. 공부를 시켰으면 잘난 사람 만나 살았거나 한 자리하고 있을 텐데 내가 너무 가난해 딸을 그리 만들었다며 눈물을 글썽이신다. 큰아들은 지금 일본에서 살고 있는데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고, 둘째는 배 농사꾼한테 시집을 가서 해마다 배는 실컷 먹는데 농사를 대물림해 참 안됐다 한다. 공부 많이 시킨 자식은 멀리 가 있어 보기도 힘들고 오히려 고생시킨 딸들이 잘하니 난 죄인이다, 큰아들은 대학을 보내고 셋째는 공장을 보냈으니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자식 사랑이었다며 후회하시는 걸 볼 때면 매번 안타깝다.

하도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라 외운지 오래인데 어르신은 처음하는 양 한 결 같이 눈물을 흘리고 웃고 하신다. 뒤죽박죽 이야기를 세 번째 들을 때쯤 눈치를 챘다. 치매가 왔음을. 보건소에서 하는 치매선별간이검사를 해봤더니 인지 저하다. 제일 살갑게 한다는 셋째 딸이랑 통화를 해 정밀 검사를 받아 볼 수 있도록 안내를 해줬다.

치매 진단을 받은 후 낮에는 주간보호시설에 가서 놀다 오시는 것이 어르신의 일과가 됐다. 시설에서 시행하는 여러 프로그램에도 참여해 보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자꾸 기억을 잃어가는 어르신을 지켜 볼 때면 마실 오셔서 환하게 웃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제는 진료소 출입도 불가한 상황이다. 일상생활도 여의치 않아 마당가의 채마 밭엔 풀만 무성하다. 마늘이랑 상추랑 아욱이랑 감자를 심어 놓고 풀 한 포기 없이 가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울타리 너머로 콩이랑 호박이 열리면 진료소 쪽 것은 소장님 몫이라며 건네주곤 하셨다. 그 뿐인가. 보건소에서 하는 프로그램엔 모두 참석해 빛을 내주셨던 어르신. 주전부리가 생각난다 싶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부추, 호박을 듬뿍 넣은 부침개를 해가지고 오셔서 함께해 주셨던 분이다.

요즈음은 퇴근 무렵 쯤 주간보호시설에서 집으로 오시는데 가끔 담 너머로 어르신에게 인사를 하면 “진료소 아줌마!”한다. ‘우리 소장님’이 어느 순간 아줌마가 됐다. 어느 때는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반응이 없다. 눈물이 난다. 멀리 사는 친척 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이 하나 틀린 말이 아니다. 내게는 매일 만나는 어머니이고 언니였다.

날 기억하지 못해도 그나마 주간보호시설에라도 가셔서 실컷 웃으며 지낼 수 있음이 감사하다. 몇 년 전에 부추를 나눠주셔서 텃밭에 심어 놓은 것이 제법 자라 부추 듬뿍 넣은 전을 만들어 달달한 커피 한 잔을 퇴근길에 가져다 드렸더니 달게 드신다.

쉼 없이 달려온 삶이 너무 고되었나. 딸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리 되셨나.

기억을 더 잃기 전에 삶을 마무리할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꾸 기억을 잃어가는 어르신을 볼 때면 세월이 원망스럽고 아프다. 진료소를 찾는 어르신들도 이제는 분주한 삶일랑 좀 내려놓고 자식들 봉양 받으며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진료소장으로 부임하던 날 어머니가 “어르신들한테 잘 해라. 추운 날 약 타러 병원에 간 적 있는데 젊은이들이 저희끼리만 차를 마시고 손 하나 안 잡아보더라. 물이라도 대접해 드려라”라고 당부한 말씀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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