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희 논설위원 / 소설가 / 한국선비정신계승회 회장

강준희 논설위원 / 소설가 / 한국선비정신계승회 회장

(동양일보) 좀 어려운 말로 ‘요계(澆季)’란 것이 있다.

요계란 ‘요계지세(澆季之世)’의 준말로 인정이 메마르고 도의 도덕이 땅에 떨어진 말세를 일컬음이다.

요즘 유행하는 시쳇말로 하면 모럴해저드, 즉 도덕적 해이를 말함이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행위, 그리고 자세에 있다.

그러려면 첫째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고 둘째 해서는 안 될 일은 해서는 안 되는데 있다.

이럼에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이는 동물이나 다름없어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한다.

즉, 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 같은 짓거리를 하는 자를 우리는 인면수심이라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강원도 영월군 모처에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하늘 보기가 두렵고 사람대하기가 겁이 나 얼굴을 바로 들고 다닐 수 없어 사람 된 것을 부끄럽게 하는 철면피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마을은 농촌으로 188가구에 345명의 주민이 산다고 한다.

더욱이 이 마을은 벼, 고추, 과수 농사가 잘 되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풍족해 마을 인심도 후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심 또한 순박해 전형적인 농촌마을을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농촌 마을에 가당찮게도 사람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겨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한다.

사연인즉슨 여성 A씨(26)를 6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마을 남성 7명이 수년간에 걸쳐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마을이 황폐화 됐다고 한다.

피해 여성 A씨는 정신박약으로 3세에서 5세에 이르는 정신연령 소유자라 한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져 성폭행한 남성 7명 중 3명이 구속되고 4명은 불구속 기소해 검찰에 송치됐다고 한다.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피의자로 알려진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의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백발이 성성한 80대 한 피의자는 “A씨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는 기자 질문에 “몸을 한 번 만져보자고 말한 게 전부고, 손녀처럼 사랑스러워 그랬노라”는 대답이 전부였다 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또 “나는 누구보다 A를 아낀 사람”이라며 “경찰이 A씨 말 만 믿고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피의자는 자기 아내를 내세워 “내 남편은 죄가 없고 A씨가 자꾸 남편에게 덤벼들어 만져만 봤다”며 남편을 옹호했다 한다.

행간의 의미가 어디에 있든 남편이 A씨를 성폭행한 건 약여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A씨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어머니는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이런 A씨는 할머니 손에서 컸는데 2004년에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큰아버지(68)와 둘이 살았고 태산 같이 믿었던 큰아버지마저 범행에 가담했다니 이런 기막힌 노릇이 어디 있는가?

이런 짐승만도 못한 작태가 벌어지자 주민들은 피의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며 경찰에 요구하고 있다 한다.

이럼에도 피의자들은 철면피하고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마을회관에 자주 얼굴을 내민다니 이런 금수(禽獸)만도 못한 위인들이 어디 있는가?

자,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는 사람이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게 무엇인가?

이성(理性)이 아니면 인성(人性)으로라도 해서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려 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무릇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 아니 인간의 가치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자세’와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자세 어떤 행동으로 살고 또 살아가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형태와 방법, 수단이 있다.

방법에는 떳떳함과 비열함이 있고, 수단에는 정당함과 부당함에 있다.

떳떳함과 정당함은 하늘을 봐도 두렵지 않은 ‘부앙무괴(復仰無愧)’이고, 비열함과 부당함은 하늘과 세상에 대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참괴(斬愧)’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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