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서쪽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간직한 비냘레스. 석회암이 빗물에 녹아 평지로 변한 뒤 남겨진 모고떼 지형에 그려 둔 선사시대 벽화. 인공적인 그림이지만 사진 작가에겐 빼어난 피사체다.

(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피사체를 비틀어 볼 줄 아는 재주꾼이라면 모델을 탓하지 않아도 좋다. 게다가 쿠바에서라면 어떤 오브제를 고르더라도 빼어난 작품으로 만들어 낼 환경이 갖춰져 있다. 그런 곳이기에 카리브해 건너온 여행자는 뷰 파인더와 피사체 비교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모델은 그걸 기회 삼아 팁을 두둑하게 받아내려고 고객이 원하는 포즈를 잡으려 몸을 꼬거나 절로 손을 펴서 턱 아래 갖다 댄다. 다듬어진 모델 몸매며 원색 의상은 눅눅한 습기나 정오의 햇볕까지 오롯이 살려낸다. 그들 덕분에 오백 년 된 시가지의 허술함이 빼어난 아르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걸 노려 생계 이어나가려는 현지인의 이색적인 퍼포먼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여행자에게 꽃바구니 들고 다가가 팔짱을 낀 채 초상권을 파는 여자는 하수다. 손에 쥔 꽃처럼 시들어가는 여자가 늦기 전에 팁을 챙기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인다. 스페인 정복자 손에 처참하게 죽어간 쿠바 원주민 추장 아뚜에이의 아픔 따윈 잊은 듯 야자나무 수피로 만든 옷과 모자를 갖춰 입은 남자가 팁 몇 푼에 뷰 파인더를 빼곡히 채운다. 그 걸로도 안 통하면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쿠바 국기로 만든 옷을 입히거나 체 게바라 모자와 선글라스를 씌우기도 한다. 그마저 식상하다 싶으면 백발 할머니를 등장시켜 벤치에 앉힌 뒤 헝겊 인형 꿰매는 모습을 보여줘서 남다른 아르떼 탄생의 신화를 쓴다.

자연 그대로의 풍광에다 색감이며 모양 특이한 피사체가 널린 아바나. 어느 곳에 초점을 맞추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도 배경이 남다른 덕분에 뷰 파인더 속 모델은 튀어 보인다. 촬영 조건을 맞추기 어려워 짜증스러울 땐 각양각색으로 차려 입은 행인이 빠르게 혹은 느리게 카메라 앞을 스쳐가며 구도틀을 채워준다. 쿠바에서만은 어느 누구도 초상권을 주장할 줄 모르니 카메라 맨 사진작가가 떼 지어 몰려드는 것이다. 까사에서 만난 중년 사진작가는 ‘변두리를 둘러볼 때였어요.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어떤 사람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고 있었어요. 그때 바라본 무념무상의 표정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데, 어떻게 여길 다시 오지 않을 수 있겠어요?’ 모델이 되어준 대가랄 것도 없지만 주머니엔 풍선이며 머리핀 같은 선물을 늘 넣어 다닌다고 귀띔해 준다. 물자 부족에 시달려 온 그들은 사진 찍히는 게 신기한 듯 팁 몇 푼에 모델 삼는 걸 고맙게 여기는 듯하다. 그 얘길 듣고 모로 요새에서 열린다는 국제 도서전시회에 들렀다가 하얀 옷 차려 입은 부부 산떼리아 신도를 몰래 찍었다가 눈총 받은 걸 기억하면 아직도 뜨끔하다.

굳이 고개 돌려 살피지 않아도 모델은 널렸다. 의상 제대로 갖춰 입은 늘씬한 몸매의 아가씨 찾기가 어렵다면 시가 피워 문 카우보이 차림의 남자가 쁘레시덴떼 맥주 마시는 모습으로 뷰 파인더를 채울 수도 있다. 그의 당당한 모습은 소 키우는 일에 자신보다 나은 대통령이 있으면 나와 보란 뉘앙스가 깔렸다. 줄 지어 놓인 포탄 위에 걸터앉은 겁 없는 소녀들도 모델로서 손색이 없다. 그들 포즈를 보면 혁명의 열기가 여태 식지 않았다는 게 오롯이 드러난다. 부끄러워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할 연인들은 사랑을 나누는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팻말을 버젓이 붙여둔 채 둘만의 행위에 몰입한다. 야외 공연이 열려 복작거리는 곳에서도 그들 사랑은 남의 눈치 따윈 상관하지 않는다. 젊은 물라토와 백인 여자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치 진한 애무를 하지만 주위의 어느 누구도 그걸 눈여겨보지 않는 퍼포먼스는 블랙 코미디 못지않다.

사람 모델이 싫증나면 동물에게 시선을 옮겨가도 좋다. 기린처럼 목을 늘인 말이며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낸 소가 풀 뜯는 광경은 유기농 환경을 지켜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농사에 동원된 소는 제대로 먹여 갈비뼈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두 마리 머리를 엮어 겨리질 하는 피사체는 애처로운 풍경으로 남겨진다. 부룩소 길들일 때 타던 썰매 크기의 염소 수레며, 자그마한 공원에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던 캣맘과 떠돌이 개 놀려대다 주민에게 꾸중 듣는 행인도 모델 삼기엔 그저 그만이다. 그럴 때의 인간은 짐승의 선한 모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불과하다. 어슬렁거리는 개를 모델 삼으려고 살펴봤지만 목줄 걸린 건 한 마리도 없다. 그래서일까 시골구석까지 여행을 다녔지만 개 짖는 소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쿠바의 개를 가리키며 ‘얘는 물지 않아요.’ 라고 말한다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늘에서 한 폭 그림이 되어주는 맹금류나 흙 속으로 체 게바라인 양 길을 만들어가는 붉은 개미의 작업도 낯설어서 카메라 앵글을 꽉 채우고 남는다. 배경이 심심할까봐 등장하는 공작새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 바비큐 불가마 위에 올라가 눅눅한 몸을 말리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생명 있는 것만 모델이 되란 법은 없다. 대로변 여기저기에 써 놓은 혁명 구호에다 전사한 영웅들이 남긴 말도 보기 드문 피사체다. 그걸로 부족하다 싶으면 전깃줄에 걸쳐 놓은 신발이 또 다른 메타포를 던져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처음 사랑을 나눈 기념이라거나 여기가 마약 소굴이란 표시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뒤늦게 귀로 흘러든다. 미술관 입구에 걸어놓은 촛불 든 사제들 그림, 그보다 물에 비친 반영이 더 강한 은유를 담은 채 침묵으로 혁명의 본거지란 메시지를 전하는 모델의 나라가 바로 쿠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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