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 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중장년이 되면 딱히 놀이문화가 없다. 여가의 주변인이 되기 십상이다. 만인의 운동으로 비약적 성장을 한 골프마저 내키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은 훌쩍 성장했고 부모와의 동행을 거부한다. 아내는 자기개발과 양육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한다. 먹고살기 위해 직면해온 가슴 먹먹한 것들을 소주 한 잔과 함께 털어놓고 내려놓는 것이 그나마 중장년의 해방구이다. 소소한 일탈이다. 청년의 시절에 품었던 희망이란 것이 뜬구름으로 둔갑한 중장년이 되면 세상의 모든 일이 나른해진다. 관계는 바람이 부는 대로 홑이불처럼 펄럭인다. 그럴 때면 삶의 위로는 술자리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세상 부조리와 고난의 진통제로 술은 그렇게 작동된다.



내겐 유명 배우 형님이 한 분 있다. 이따금씩 만나 술도 한잔한다. 반듯하고 젠틀한 형님을 ‘주당’이라고 칭하기엔 불경스럽지만, 이분, 분위기가 맞으면 소위 ‘말술’을 마신다. 그리스 로마,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재림 같다는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대적할 이는 적어도 내 주변에 없다. 어느 날 영등포 선술집에서 폭탄주를 돌려 마시며 ‘술은 속 깊은 연대’라 하신다. 영욕의 부침 없는 들판 민들레처럼 피고 지는 소시민적 삶을 사는 나로서는 그간 직업과 연계되는 생계형 술자리가 대세였다. 허나 서늘한 이해관계의 술자리가 아닌 사람의 향기로 담아낸 술을 주고받는 자리라면 그 술은 ‘연대의 도구’이다. 형님 말씀 참으로 지혜롭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사소설’에서 “훌륭한 사람은 술에 취하면 착한 마음을 드러내지만 조급한 이는 술에 취하면 사나운 기운을 나타낸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과유불급의 술자리가 참 많았다. 이덕무의 지적처럼 착한 마음이 드러날 만큼의 술자리는 모두의 바람이지만 술은 이성을 마비시키니 도리 없다. 술 약속 전에 상대의 주사를 예견하는 내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지인들과의 술자리는 대개 점점 커지는 목소리와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들로 갈음된다. 그러나 가슴에 맺힌 것들을 풀어내는, 어쩌면 작은 살풀이다. 그 일상의 잔칫상에 올려진 소주는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가격경쟁력과 만취의 결과를 안겨준다. 주세가 높은 외국 증류주와 달리 소주는 주머니 형편 살펴주는 속 깊은 지인이다.



한국 사회에서 폭탄주는 술자리의 대세가 된지 오래이다. 어림짐작이지만 이런저런 음식재료를 섞는 비빔밥 음식문화를 일군 민족 정서가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폭탄주의 핵심은 속도전이다. 소주와 맥주를 황금비율로 섞어 마심으로 도수 높은 소주에 흡착된 맥주 속 탄산가스의 효과를 극대화한 과학적 제조법이다. 대한의 주당들, 아카데믹하며 ‘빨리빨리’ 문화의 전형이다. 평등과 단결은 폭탄주의 가치이다. 그러나 ‘묻지 마’ 평등의 원칙이 적용되다 보니 개인의 주량은 고려 없다. 주량이 모자란 사람은 만취할 수밖에 없다. 급기야 술이 사람을 마신다. 대화는 뒤로 한 채 술만 탐닉하게 되는 치명적 단점도 있다. 효율적이고 향기 있는 바른생활 술자리를 지향한다면 딱히 권장하고 싶지 않다. 폭탄주 자격증, 명랑하지만 해괴하다.



예외 없다. 술이 정도를 넘어서면 통제되지 못할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술이 주는 감정에 취해 풀고자 했던 매듭이 더더욱 엉키게 되고 서로 간의 소통 자체가 힘들어질 정도의 인사불성 상태에 직면한다. 전반적으로 과한 술자리는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돌이켜 보면 흐지부지한 마무리, 사달이 난 술자리를 겪고 다음 날이 되면 연대와 결기는 뒤로한 채 쓰린 위장만 부여잡는 일이 허다하다. 과한 술자리가 주는 보건학적 산물이다.



‘술자리’라는 단어에서 ‘술’보다 ‘자리’가 작동되는 것이 먼저다. 전 세계 1인당 술 소비량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술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퇴근 후 술자리는 사회생활의 연장이 된지 오래이다. 술 취해서 한 실수는 관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그릇된 인식도 퍼져 있다. 관계도 저해하고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술 때문에 결례를 했다는 말은 더 이상 설득력 없다. 바른생활 술자리를 원한다면 ‘함께하는 자리’에 방점을 찍고 절제의 미학이 필요하다. 술보다 그의 속 깊은 이야기를 먼저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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