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종 호 논설위원 / 청주대명예교수

 

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하천과 저수지는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수량이 적어지고 곡식들은 말라비틀어지고 거리의 사람들은 걷기 힘들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거 하늘이 지구를 태워버리려는 것 아냐”라는 대화를 나누며 고통을 호소케 하던 더위, 40도를 웃도는 폭염, 그래서 한국에서 대표적인 염천(炎天) 지역으로 알려진 대구와 서울을 가리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 및 서프리카(서울+아프리카)‘라는 말까지 등장케 하던 열대 고온. 가마솥더위’라기 보다는 ‘전기밥통 더위’였다.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111년 만에 나타난 기록적인 더위였단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볕더위에 시달리던 때가 언제 이었던가’라 말할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에어콘과 선풍기가 없이는 한시도 버티기 힘들었었는데 이제는 이것들이 없어도 무난하고 새벽 잠자리에는 이불을 대령할 정도로 선선해졌다. 8월 7일의 입추, 16일의 말복을 거쳐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23일의 처서가 지나고 나서의 현상이다. 이렇듯 자연은 어김없이 스스로의 길을 가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자기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봄이 되면 햇볕이 따스해지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T.S 엘리어트가 ‘황무지’라는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죽은 땅으로부터 라일락꽃이 피어나게 한다”. 여름이 되면 마치 태풍이 바다를 뒤집어 놓듯 뜨거워진 태양이 지체(地體:지구의 몸체)를 태워 다시 태어나게 한다.

가을에는 높아진 하늘과 넓어진 들판에 소슬한 바람이 찾아와 과실을 거두게 하고 그 빈 터 위에서 서정시를 쓰게 하는가 하면 봄에 싹이 나서 여름에 짙푸르게 우거진 녹목(綠木)들을 빨갛고, 노랗고, 갈색 등의 색으로 옷을 갈아입게 한 다음 낙엽되어 사색의 길을 떠나게 한다. 그리고 겨울이면 하늘과 땅은 얼어붙고 자연은 깊은 적막과 긴 침묵 속에 빠지게 한다. 4계절 24절기가 우주가 태어날 때 깔아놓은 궤도대로 순항한다.

자연의 생활주기이다. 하늘의 순리이다. 과학이다. 인생최대의 교과서이고 지침서이다. 참으로 경외스러운 자연상이다. 자연은 이러한 모습들을 통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순리대로 살아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영위하라’고 교훈한다. 더위(고통)를 참으면(인내하면) 추풍을 맞을 수 있음을(감래:甘來) 가르친다. 그렇다 인내야말로 인생 최고의 가치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러한 인내는 소극적인 인내와 적극적인 인내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는 금년 여름 같이 전례 없는 폭염을 이겨내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힘든 환경이나 여건 등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참아 내는 인내를 말하고, 후자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강한 의지와 노력을 투입하여 그것을 달성하는 인내를 말한다. 영어를 정복하기 위하여,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밤잠을 설치며 진력하는 인내를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근면 성실하면 이루지 못함이 없음을 무언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연은 인간에게 사랑도, 창조도, 목표달성도 모두 인내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인 인내가 인생의 최고 자산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명언인 ‘참는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인자필성:忍者必成)이고, 주자가 십회훈(十悔訓)을 통하여 제시한 바와 같이 봄에 씨를 뿌리지 아니하면 가을에 후회하는 것(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과 같은 이치이다.

불속처럼 뜨겁던 여름을 보내면서, 언덕 넘어 멀리서 불어오는 상서로운 가을바람을 맞으면서 자연의 심오하고 무궁한 순리와 교훈을,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삶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는 것에 대하여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일 것이다. “자연은 신이다(Nature is God)”라는 네덜란드의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말처럼 인간은 자연을 통하여 신(神)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인생의 길을 배우게 된다. 자연처럼 순리를 따르고, 정직하게 살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다. 현실이라는 물결에 휩쓸려 인간본성의 원형인 성선(性善)을 멀리하고 사회에서 학습된 성악(性惡)과 친한 반자연적인 삶에서 탈피하여야 함을 터득케 한다.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복이 온다는 진리를 만나게 한다.

백여 년에 걸쳐 가장 뜨거웠던 올 여름, 그래서 작열하는 거리에 나서기가 두려웠고 잠자리에 들기조차 힘들게 했던 그 더위도 결국 계절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물러나는 자연의 순리를 실제의 삶에서 절실하게 경험하게 하고 인생의 교훈으로 삼게 한 올 여름을 인생을 한 단계 성숙하게 한 계기로 삼는 것은 어떨까. 폭염에게 아듀(안녕)라 인사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편지를 세상에 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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