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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 서서 / 조철호가 만난 사람 - 유영훈 전 진천군수
이 길에 서서 / 조철호가 만난 사람 - 유영훈 전 진천군수
  • 동양일보
  • 승인 2018.09.0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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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키우는 ‘동네 반장’… “목부牧夫생활이 군수 때보다 행복합니다”
진천문학공원 조성-포석 조명희문학관 건립-우석대 캠퍼스 유치-산단 조성 등 한 일 많아
‘진천 시 승격’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이제껏 ‘빚진 세월’에서 이젠 ‘빚 갚는’ 삶으로 살 것”

“군수 직에서 물러나 ‘언제 군수를 했더냐 싶게’ 소를 키우고 있다”는 소문을 따라 유영훈(64) 전 진천군수를 찾아 나섰다. 2015년 8월,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9년 2개월간 재직하던 진천군수 직함을 내놓아야 했다.

태어나 자라면서도, 두 번의 충북도의원과 9년여 간의 3선 군수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그의 고향 초평면 양촌마을은 새로 된 주소지 ‘진천군 초평면 양촌길 39’보다 옛 주소인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376-3 양촌마을’을 찾아야 시골분위기에 맞는다. 그 곳 남향받이 집에서 그와 만난 것은 폭염행진이 끝나가는 8월 하순이었다.

그가 군수로 있을 때 건립된 포석조명희문학관 운영 문제로 만나 여러 의견을 나눴던 것이 대법 판결이 나기 한 달 전이었으니 꼭 3년, 정확히 37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군수 때나 목부牧夫로 살아간다는 지금이나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아니, 혈색 좋은 얼굴하며 건장한 체구가 오히려 더 젊어진 것 같아 반가웠다.

집터가 마을 공터보다 훨씬 넓어서 물어보니 1500평이란다. 집 뒤쪽에 우사牛舍가 보였다. 사료인 건초와 곤포梱包사일리지가 쌓여있는 창고를 지나 우사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에 먹이통으로 고개를 내미는 놈들이 몇, 거의가 무관심하다. 배가 부르고 만사 편안하다는 증좌證左다. 대충 눈어림으로도 6,70마리쯤 된다.

10년이 가깝게 아침이면 넥타이를 매고 정장차림으로 출근하던 군수실 대신, 작업복에 작업모를 쓰고 매일 찾아들어가는 그의 일터다. 군수 땐 각종 업무관련 회의와 결재와 민원이 기다리고 있던 일터였으나, 이제는 주인을 반기는 크고 작은 소들이 주인의 손길을 반기는 베풂의 현장이다. 군수의 업무는 협의하고 결정하고 시행하면서 끝없는 이해관계자들의 충돌에 긴장했다면, 소를 키우는 목부牧夫는 가축에게 배부른 식량과 편안한 잠자리를 미리 확보해주는 것이 사명일 터. 채광이 좋은 우사 복도를 동행하던 유 군수는 본인을 ‘아마추어 목부’로 평가절하 하지만, 대화 도중 “눈빛으로 ‘소와의 대화’를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소를 키울 자격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프로급 목부’가 분명할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겸손하지만 전문적인 식견으로 군민들의 마음을 꿰는 눈을 가졌었기에 재임 중 충북에서는 처음으로 문학공원을 조성하고 포석조명희문학관을 건립했으며, 꿈에 그리던 대학유치우석대 진천캠퍼스에 성공했을 것이다. 또 대단위 산업단지를 조성했고 절대농지 3만평을 도시계획지구로 변경해 재래시장을 이전하는 등 진천읍내의 지형과 삶의 양태를 바꾸는 꿈을 이뤘을 것이다. 아니, 가장 내세울만한 것은 그가 군수 직에서 물러날 때 진천군민들의 GDP(국내총생산)가 3만5000달러로 한국에서 두 번째 자치단체로 기록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진천군민들은 그를 진천군수 3선 고지에 올려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군수 때보다 더 건강하고 늠름해 보입니다. 마음이 편해져서인가요? 생활이 편해져서 인가요?

“군수라는 직책은 매일 각기 다른 취향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공통분모를 찾아야하는 자리입니다. 한 자치단체의 온갖 살림을 총괄하는데 따른 정신적 육체적 고군분투는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세상이란 돌아서서는 물론이고 서로 눈을 마주보면서도 입으로는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생각을 합니다. 이에 따라 ‘속거나’ ‘휘둘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소들은 눈빛으로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든지 배가 고프다든지 어디가 아프다든지 모기 파리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든지… 이 같은 정직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목부로 자격이 있고, 비로소 프로급이 됩니다.”

-유 군수는 프로급입니까?

“17살 때부터 소를 키웠으니 연조로 보아도 당당히 프로급에 속해야하지만, 군수 하느라 10년 공백이 있어 아직은 아마추어 일 것입니다.”

-소와 일찍 인연이 있었군요.

“너 나 없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습니다. 그 때의 소는 어느 집에서나 큰 재산이었지요. 5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난 나는 형이 고등학교에 가야 했으므로 중학교만 나오고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 남자 동기생이 13명이 있는데 그 중 중학교 진학생이 3명이고 고등학교 진학이 2명 뿐 이였습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손바닥만 한 땅에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너는 형 때문에 고등학교는 못 간다’고 말씀 했을 때도 섭섭하기보다는 응당 그렇겠지 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4-H 활동에 관계하게 됐고 아버지가 고등학교 못 보낸 대신 집에 있던 일소를 키우라고 주셨던 것이 소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농촌계몽활동에 가담하게 된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중학교 때 읽은 심훈(1901~1936·소설가이자 영화인)의 소설 ‘상록수’가 농촌운동에 뛰어들게 한 단초이자 내 인생을 결정지은 감동을 주었지요. 주인공 박동혁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농촌의 무지를 깨우치고 가난을 물리치는데 앞장을 서는 진정한 청년농업인이 되고자 하는 꿈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서러움 보다는 4-H 멤버들과 농촌문제로 토론하는 열정적인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여 주인공인 채영신과 같은 여성과의 사랑을 그려보진 않았나요?

“그러지 않아도 그 때 농촌계몽활동을 함께하던 처녀와 열애에 빠졌었지요. 내가 지역단위의 4-H 회장을 맡고 있을 때 부회장을 하던…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중간에 고연히 정치한답시고 외유를 하는 바람에 그 당시의 아름다운 꿈이 얼룩지고 젊은 시절이 지나면 절대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약조를 지키지 못해 지금도 늘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 회상에 잠기는 표정이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가난했던 시절의 농촌운동을 할 때보다 가난하게 선거운동을 할 때가 훨씬 더 힘들고 외로웠다”며 잠시 대담을 멈췄다)

-군수 재임 때 하려다 못한 아쉬운 사업이 있다면…

“진천시를 만들어 문화와 교육의 도시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 했었습니다. 이를 위한 문화복지재단을 설립하려했고, 장례문화를 장례식-화장-안치까지를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의회의 반대로 무산됐지요. 의회 의결도 이해는 되지만 많이 아쉬웠습니다.”

-재임 때 문학공원을 만들고 문학관을 건립하는 등 왜 문학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요.

“나는 학교라곤 중학교가 최종학력이지요. 고등학교 과정이나 대학 등은 모두 통신강의를 통해 거쳤습니다. 그리고 농촌의 실상을 몸으로 부딪치면서 소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틈틈이 읽은 책들을 통해 문학이 주는 상상력과 깨우침이 얼마나 지대한 에너지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교육만이 새로운 것을 만드는 힘이란 사실도 알았어요. 그런데 진천은 교육의 선각자인 보재 이상설(1870~1917) 선생과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인 포석 조명희(1894~1938) 선생이 태어나신 보배로운 지역입니다. 이 보다 더 축복받은 지역이 어디 있습니까? 이 두 선생의 위대한 생애만 잘 기리면 이 나라에서 최고의 정신적인 지도자를 모시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이상설 선생에 관한 것은 나라가 생가복원과 사당건립으로 추모사업을 해왔고, 조명희 선생은 뒤늦게나마 지역에서 기리는 추모행사가 시작이 됐습니다. 문인들을 중심으로 문학관 건립 분위기가 조성돼 도비지원 등에 힘입어 문학관이 건립 되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설계부터 쓰임까지가 ‘예쁘고 알찬 문학관’이란 평을 받고 있어 기쁨이 컸습니다.”

-재임 중 가장 괄목할만한 사업성과를 거둔 것이라면…

“대학 유치입니다. 도의원시절에 ‘진천군대학유치추진위’의 위원장 역을 맡아 꿈꾸어오던 사업을 군수 재임 때 이루게 된 성취감이야말로 개인적으로나 군민들을 위해서나 큰 기쁨입니다. 더구나 대학의 위치가 변두리가 아닌 진천읍 교성리로 옛 향교가 있던 곳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어 2013년 4월8일 기공식 때 목이 메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우석대 진천캠퍼스의 정원이 2000명인데 현재 1700명이 재학하고 있습니다. 이들 젊은이들이 진천읍내의 곳곳을 누비는 모습만으로도 진천이 젊어지고 역동성이 느껴져 흐뭇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이 미래의 진천을 이끄는 힘이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끌어오던 공직선거법 위반여부의 갑론을박이 끝내 ‘자격정지에 해당하는 형’의 확정으로 갑작스럽게 군수 직을 내놓게 된 충격에서 목부로 일손을 잡기까지 숨고르기를 한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요.

“꼭 3년 전 8월에 군수 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웃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향의 이웃들은 그동안 두 차례의 도의원과 3선의 군수 직을 갖도록 해 준 은혜로운 분들입니다. 때로는 선거운동원이 되고 어느 땐 박수부대로 자원하여 도와주기도한 명실공히 ‘이웃사촌’들이지요. 군수 되기 직전까지 맡아왔던 ‘양촌리 1반장’(이장을 보좌하며 5반까지 있음) 직을 10년 만에 되돌려 달라고 간청하여 복귀하는 일부터, 농사일이 뜸하면 이웃사람들과 인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 ‘점심 품앗이’에 이르기까지 ‘돌아온 이웃’이 되는데 한 두 달이 걸렸습니다. 군수 직을 마감할 때 보니 이런 저런 채무가 2억 원이나 돼 조금은 긴장이 됐습니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열심히 일 하면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소를 키울 건강과 경험이 있어 여러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2015년이 저물고 새 해가 된 어느 날 진천한우협회장을 하는 친구 둘이 강원도나 가자며 불러냈습니다. 동해안 어디쯤 가서 생선회를 먹자는 것으로 알았는데 의외로 춘천 어느 축산농가에 들어가더니 어미소 11마리와 사료 등을 구입하느라 7000만원을 지불하면서 ‘집을 사려던 돈이니 2년 정도 여유가 있다’며 무이자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사는 준비돼 있었으나 갑작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소 키우는 일이 시작 됐습니다. 겨우(?) 반년 정도 쉬고 ‘목부’라는 새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의 목장을 하려는 것인가요.

“우사는 100마리를 사육할 수 있는 크기입니다. 현재 어미 소 50마리와 송아지 20마리 정도 됩니다. 이 정도만 유지하려 합니다. 혼자 사육하기에 적당하지요. 새끼 낳아서 키우고 팔고 하다보면 친구가 빌려 준 돈이며 지난 해 받은 축산 운영자금 2억 원(그 돈으로 큰 소 20마리를 샀다)도 기간 내에 갚게 될 것입니다.”

-명함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쓸 일도 없고 앞으로도 필요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이 메일 주소도 없고 웬만한 전화도 되도록 받지 않으려 합니다. 소를 키우며 이웃과 다정하게 사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종교는?

“50대에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초평교회를 다니다가 군수 때부터 지금까지는 진천 중앙교회를 나갑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고자 하는지요.

“양촌리 1반장으로, 소 키우는 목부로, 좋은 이웃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동안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 준 이웃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습니다. 금전적인 빚도 많지만 이웃사람으로 신세 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 농담처럼 말합니다. 의무적으로 80세 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빚을 다 갚을 수 있다고. 가족(부인 손순득·64·보험설계사, 장남 진상·41·현대모비스 본사 차장, 차남 혁상·39·진천 파고랜드 대표)들에게도 미안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살아 온 것이 빚을 지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빚을 갚기 위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긴 강물이 큰 굽이를 돌아들면서 유연함을 갖듯, 공직의 기억은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아집과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고향과 이웃과 자신에 대하여 지극히 겸허한 자세로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3선 군수 출신을 동네 반장으로 품고 있는 초평면 양촌리의 지존至尊함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 동양일보 회장·시인


■ 유영훈劉永勳 전 군수는…

*1955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양촌길 39 양촌마을 출생
*1973년 서울통신고 졸업
*1975년 서울통신대 졸업
*1982년 진천농어민후계자협의회장
*1988년 진천육우협회 초대 회장
*1991년 4대, 5대 충북도의회 의원(부의장)
진천푸드뱅크 대표
*1993년 충북대 행정대학원 졸업
*2006년 진천군수
*2015년 진천군수 (3선) 9년 2개월간 재임
*2015년~현재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 1반장
*2016년~현재 고향집에서 번식우 사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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