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허태정 대전시장이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한 이래 시민들의 의견을 시정에 담으려 벌여온 실험들에 차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제껏 시민들의 목소리는 ‘민원인들이 항상 하는 소리’거나 ‘이기적인 요구’처럼 여겨지곤 했지만, 허 시장은 “시민들이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며 시민들의 입에 귀를 한껏 기울이려 하는 것 같다. 이를 바탕으로 이해관계자들, 전문가들과 함께 대전시 정책을 가다듬어 내놓고 있다. 참여민주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의 시동이라는 평가다.

숙의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생각해 넉넉히 의논함’이다. ‘숙의민주주의’란 그런 숙의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이다. 영어 ‘deliberative democracy’를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deliberative’는 ‘토의하는’이란 뜻이다. 우리 정치학계 일각에서도 이를 차용해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사회적 쟁점에 대해 하나의 대안적인 해결 방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한 보완책에 불과했던 숙의민주주의는 이제 직접민주주의, 참여형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이런 점에서 대전시 행정에서 숙의민주주의를 일상적으로 활용하겠다는 허 시장의 결단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시는 앞으로 관련 조례를 개정해 현재 소극적·포괄적인 주민참여 수준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시민이 직접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현재 진행 중인 월평공원 공론화 사례 경험을 토대로 '대전형 숙의 매뉴얼'을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2006년 제정된 '대전시 주민참여 기본조례'를 전부 개정해 오는 11월께 '대전시 시민참여 활성화 기본조례(가칭)' 입법 예고하기로 했다.

현재는 주민참여·갈등관리 조정 과정에 시민이 소극·선언적으로 참여했다면 개정된 조례에는 시민 참여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는 기반을 조성하고, 사안에 따라 맞춤식 숙의과정을 거치도록 제도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숙의를 활용하더라도 민주적이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숙의민주주의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대표성과 정당성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숙의의 절차에 대한 광범한 사전 합의가 있어야 한다. 사전에 합의할 절차 가운데는 당연히 숙의에 참여하는 시민의 범위와 선택 방법도 포함돼야 한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선출된 시의원과 구의원들이 이미 존재하는 마당에 새로운 시민 대표를 뽑아 숙의하려면 이들이 모집단인 시민 전체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전시 안팎에선 ‘허태정식 대전 프로세스’라는 표현이 들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청책’, 전문가 등과 정책을 만들어내는 ‘숙의’, 그리고 시민들과 함께 정책을 실현해가는 ‘협치’를 이뤄간다는 것이다. 대전시정에 이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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