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시낭송 운동을 벌여온 지 어언 25년. 이제 시낭송이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도 ‘아 사람들 앞에서 시를 암송하는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여기저기에서 시낭송 대회도 열리고, 시낭송전문가들이 활동하면서 동호회도 만들어지고, 문화재단 플랫폼 사업으로 시낭송을 가르치는 곳도 생겼다. 그만큼 시낭송이 생활 속에서 가까워졌다.

1992년 11월1일 ‘시의 날’을 맞아 첫 시낭송 행사를 열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너름새’라는 연극 공간에서 관객들과 차 한잔을 나무며 시낭송 행사를 열었을 때 많은 관객들이 낯선 행사에 박수를 보냈었다. 청소년시절 한번 씩은 경험했을 ‘문학의 밤’을 떠올리며 이런 행사가 지속되면 좋겠다는 부탁의 소리도 들었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시낭송 운동이었다. 우리가 시도하는 이런 일이 호수에 파문이 일 듯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간다면 진실로 우리 사회가 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올해로 19회를 맞은 동양일보 ‘명사 시낭송회’도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

어쩌면 삭막한 사회에서 가장 시와 먼 사람들이 전문직 종사자와 사회지도층 인사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1년에 한번 만이라도 바쁜 일상을 접고 감수성을 회복해 관중 앞에서 시낭송을 하는 기회를 갖게 하고자 마련한 행사가 ‘명사 시낭송회’다. 그렇게 해서 한 해도 거름없이 19년 동안 충북도내를 순회하며 200여 차례 행사를 열었다. 무대에 오른 연인원만 5200여명, 65000여 명의 관중이 이 행사를 지켜보았다.

시낭송의 역사는 오래 됐다.

기원전 8세기경에 씌어진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아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시낭송 택스트였다. 펠레포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군이 패배한뒤 아테네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시를 낭독하며 위로받았고, 알렉산더왕도 어린 시절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호메로스의 시를 암송토록 교육받은 덕에 원정길에서 시를 옲조린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시대에는 문예애호가들이 자신의 집에 아우디토리움(Auditorium)이라는 낭독회장을 개설하여 손님들을 초대해 시를 낭송하는 풍습이 있었다.

공자가 펴낸 시경(詩經)은 거리에서 낭송되어 온 시를 모은 것이다. 본래는 3000여 편에 이르나 공자에 의해 305편으로 간추려진 것이 시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선비의 기본 요건은 시 암송이었다. 고려 충숙왕은 과거 응시자들에게 시를 암송케 해서 과거에 응시하려면 적어도 1백수는 외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내 시낭송 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광복직후 혼란기였다. 1948년 박거영 시인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시낭독연구회’가 대중들을 상대로 자작시 낭독회를 열었는데 오장환 이용악 이병철 시인 등이 참여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낭독회는 참여했던 시인들이 월북함으로써 문을 닫게 되고,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김규동 시인의 발의와 박거영 시인의 경비 후원으로 부산의 임시천막건물 이화여대 강당에서 대규모 시낭독회가 열렸다. 김규동 시인의 자전적 에세이에 의하면 시인 33명이 참여한 이 행사에는 무려 2000여 명의 청중들이 몰려들어 위안도 희망도 없던 암담했던 전쟁 속에서 시로 위로와 치유를 받았다고 했다.

시낭송이 주는 힘은 크다.

메말랐던 가슴에 감성과 서정을 찾아주고 감동과 위로로 상처를 치유해준다. ‘명사 시낭송회’는 바로 이러한 시를 삶 속에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한 인문학캠페인이었다. 지난 3일부터 14일까지 충북도내를 순회하는 ‘명사 시낭송회’가 이어지고 있다. 매일 매일 주옥같은 시낭송이 감동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동양일보는 이번 19회를 끝으로 이 행사를 마감하려 한다. 대신 내년부터는 시즌Ⅱ로, 더 다양한 방법으로 시가 있는 삶을 위한 새로운 인문학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