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기 신란(親鸞)의 삶과 사상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일본 욧카이치대학 명예교수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일본 욧카이치대학 명예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1. 만년의신란과정정취(正定聚)론

90년의 인생을 살다간 종교인 신란의 서간의 대부분은 79세에서 88세의 고령기에 집중돼 있다. 이 시기에 신란이 직면한 현실은 정치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현실을 피하지 않고, 거기에서 진실을 보려고 사색을 더해가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의 종교적 핵심이 열리게 된다.

고령기의 신란이 서간집에서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정정취(正定聚)’라는 개념이다. ‘정정취’란“신심(信心=신앙)을 얻으면 자기중심주의적인 가치관이 붕괴되고, 목숨이 다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 확정된 사람들의 무리가 된다”는 의미다.

신란은 “진실세계에 태어난다”는 의미에서의 ‘정토왕생’(浄土往生)의 조건을 ‘나의 힘’에 의한 생전의선근공덕(善根功徳)에서 찾고 있지 않다. 그곳에 태어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신심’을 갖는 것이다. ‘신심’이란 신란에게 있어서는 아미타불의 영성의 작용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각성’체험을 의미한다.

신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왕생을 얻었다(卽得往生)”는 것은 “신심을 얻을 수 있으면 곧 왕생한다”는 뜻이다. “왕생한다”는 것은 “두 번 다시 미혹으로 후퇴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위계에 오른다”는 의미이다. “불퇴전(不退轉)에 오른다”는 것은 “정정취의 위계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왕생을 얻었다(卽得往生)”는 의미이다.‘즉(卽)’은 ‘곧’이라는 뜻이다. ‘곧’이란“ 시간을 경과하지 않고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親鸞,<唯信鈔文意>)

신란에게 있어“이미 왕생을 얻었다(卽得往生)”는 것은 우리의 자기중심주의가 죽고, 부처와 함께 사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는 자신이 탄생함을 의미한다.

“이미 왕생을 얻었다(卽得往生)”는 현세에서의 “낡은 자기중심주의적 자기”의 사멸과 “새로운 주체적 자기”의 탄생, 즉 “낡은 가치관”의 소멸과 “새로운 가치관”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런 체험은‘이 나’에게 한정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체험자는 목숨이 다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 확정된‘취(聚=무리)’이다. 이 무리는 나이, 성별, 개성 등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자인 아미타불과의 관계에서는 평등해서 서로 연대하고 도울 수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왕생할 수 있을까 없을까라는 불안이나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불안은 자기중심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몸부림침으로써 생겨난다. 이 경우에는 자기의 선근(善根)·공덕(功德)의 ‘성과’에 기대를 거는 것인데, 그 노력의 결과의 판정은 목숨이 다하려고 할 때에 아미타불의 ‘부르심’(来迎)의 여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부르심’이 있는지 없는지를‘이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확신할 수 없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성의 작용에 의해 얻어지는‘정정취’라는 사상이다.



2.‘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들(염불자)의 삶의 방식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들,‘깨달은’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지 않고 평등한 신앙인집단(공동체)을 형성한다. 거기에서는 개개의 차이를 인정한 평등관계가 존재하고 상호관계성이 성립한다.

신란의 가르침에서는 정정취의 위계에 있는 자가 죽음을 맞이하면 정토왕생을 이루고, 이번에는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고귀한 것이다. ‘왕생’이라는 말은 정토교에서는“예토(穢土)를 떠나서 진실세계로서의 정토에 태어난다”는 의미로, 진실세계에 태어난다고 하는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다.따라서 정토왕생은‘기쁜’일이었다.

신란은 80세 이후에는 체력도 약해져서, 85세 무렵의 편지에서는 “눈도 잘 보이지 않고, 뭐든지 다 잊어버립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87세의 편지에서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카쿠낸보의 일은 이리저리 애달프게 생각합니다. 신란이 먼저 세상을 떠났어도(정토왕생을)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먼저 떠나시다니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카쿠신보도 작년 무렵에 (돌아가셨습니다만), 반드시 반드시 가신 곳에서 기다리고 계시겠지요. 반드시 반드시 찾아뵈러 가겠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 내년 10월경까지 살아 계신다면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은 확실합니다. 뉴도님의 마음도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제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같은 정토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무슨 일이든,무슨 일이든 목숨이 있는 동안은 편지를 쓰겠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아 주시는 것이야말로 기쁘게 생각합니다.”(앞의 책, 191-2쪽)

신란은 말년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았다. 그것은 아미타불의 영성의 작용에 의해 경사스런 정정취의 위계에 올랐다는 확신, 현실세계에 살면서 현실세계를 뛰어넘었다는 실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그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도 가지고 있었다. 정정취의 위계에 올랐다는 것은 목숨이 다하면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가 되는 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으로, 석존이 입적한지 56억 7000만년이 지나서 부처가 되는 것이 확정된 미륵보살과 동일하다.

그러나 정정취는 부처와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정정취는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고 있어서 번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번뇌는 죽음과 함께 소멸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를 갖고 있어도 신심을 얻고 있기 때문에, 번뇌는 몸을 망치지 않고 오히려 신심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비료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신심을 얻은 사람이 친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자연스런 감정으로, 그 감정은 신심을 한층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럼 이와 같은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 신란은 신심의 ‘징표’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3.신심의‘징표’를 보여주는 삶

신심을 얻은 사람은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이다. 정정취는‘등정각(等正覺)과 같은 의미이다. 85세의 신란은 정정취·등정각의 의미의 동일성, 정정취의 위계에 있는 사람과 미륵보살의‘동일성’, 정정취와 여래(부처)의‘동등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등정각(等正覺)이라는 위계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부처가 되는 것이 정해져 있는 미륵보살과 같은 위계입니다. (우리는) 미륵보살과 같은데, 이 생을 마치고 정토에 태어나면 부처가 되기 때문에 미륵보살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는 ‘차여미륵(次如弥勒)’(등급은 미륵과 같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미륵보살은 이미 부처가 되는 것이 정해져 있는 분이기 때문에 (실제는 아직 보살이지만) 미륵불과 다른 종파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륵보살과 같은 위계에 있기 때문에 ‘정정취’의 사람은 여래와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토를 바라는 진실한 신심을 얻은 사람은 몸은 아직 한탄스럽고 깨끗하지 못하여 악을 만드는 몸이지만, 마음은 이미 여래와 같다면, 여래와 동등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앞의 책, 145-6책)

신심을 얻은 사람, 즉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은 미륵보살과 같고,여래(부처)와 마음은 같기 때문에 삶의 방식과 행동에서 그 ‘징표’(구체적인 드러남)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그 ‘징표’에 대해서 신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좋아해서 부르는 사람은 이전에는 마음이 가는 대로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버리자고 서로 생각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싫어하는 징표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신심은 석가와 아미타불의 권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라고 해도 진실한 마음이 생겨난다면, 어떻게 옛날 마음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앞의 책, 25-6쪽)

여기에서 신란이 말하고 있는 “세상을 싫어하는 징표”란, 신심을 축으로 한 주체적 행동, 세속의 가치관을 상대화하는 시점에 기초한 행동을 의미한다. 신란의 친아들 젠란(善鸞)은 1256년에 권력에 영합해서 가마쿠라막부에게 염불을 금지시켜 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 사실을 안 84세의 신란은 젠란을 엄하게 비판하고 의절장(義絶状)을 보낸다. 가마쿠라막부의 법정에 선 제자 쇼신(性信)은 2년 가까운 법정투쟁에 승리한다. 이 보고를 받은 신란은 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가마쿠라에서의 소송에 대해서는 대강 들었습니다.…재판에 이겨서 고향에 돌아가시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 이번 소송은 쇼신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토왕생을 바라는 모든 염불자들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고 호넨(法然) 성인 때에 저신란도 여러 가지로 들었던 말입니다 .특별히 새로운 소송은 아닙니다. 쇼신 한 사람이 처리해야 할 성질의 일이 아닙니다. 염불을 하는 사람은 모두 일치단결해서 대처해야 하는 일입니다.”(笠原一男,『親鸞、煩悩具足のほとけ』,NHKブックス, 昭和49年, 212쪽)

신란을 비롯하여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제자들은 평등한 동료다. 이런 주체적, 자립적 염불자 집단에 대해서 지배자 계급은 체제유지의 불안을 느끼고 탄압을 가한다. 신란으로서는 그런 탄압은 스승 호넨(法然)과 함께 이미 경험한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란은 이 소송사건을 쇼신 한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염불자 집단, 즉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들에 대한 억압이라고 지적하고, 염불자는 서로 도와서 이 사건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들의 일원인 염불자의 ‘징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쇼신이 법정투쟁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속적 정치권력을 상대화하는 입장에 서서, 염불자 집단의 정당성을 밝히는 것이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이 해야 할 행위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행위야말로 세속권력을 절대화하지 않는 입장으로서의“세상을 싫어하는 징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란은 이 편지의 후반부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 세상의 나쁜 것을 싫어하는 징표”를 보여달라고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비폭력적인 상생사회를 지향하는 활동도 포함되고 있다. 신란은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들, 즉 왕생이 결정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염불을 하는 사람들은 신심이 결정되면, 자신의 왕생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염불을 하면 됩니다. … 자신의 왕생이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분은 구원받기 위한 염불은 필요 없고, 구원해주신 부처님의 은혜를 자각한다면 보은을 위해서 마음을 담아 염불을 하고,세상이 태평하도록 염불이 확산될 수 있기를 바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앞의 책, 213쪽)

여기에서 신란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정취의 위계에 오른 사람들은 염불을 축으로 하는 사회가 되도록, 차별과 억압이 아닌 차이와 평등이 공존할 수 있는 기쁨에 넘치는 국가와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그 노력은 적대자와도 상생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작용으로,여기에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맺으며

만년의 신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염불탄압(念佛彈壓)과 그것을 돕고 있던 친아들 젠란(善鸞, 1210∼1292)과의 절연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신란은 ‘정정취’개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정정취’란 “아미타불의 영성의 작용에 의해 자기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로서의 ‘깨달음’을 체험한 사람”으로, 그것은 ‘절대자와 유한자’라는 수직관계로 파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깨달음’을 체험하는 것은 ‘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은 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같이 ‘자기중심주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사람들로, 각각은 수평적 평등관계에 있다. 이것을 수평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수직축으로서의 아미타불과 자기와의 관계, 수평축으로서의 ‘깨달은’사람들과 자기의 수평적 관계, 이 두 축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것이 정정취의 일원이 된‘나’이다.

이런 사람들에 의한 상호교차, 상호협력·서로살림을 축으로 한 공동체가 사회 속에 구체화되었을 때, 거기에는 고령자의 고립뿐만 아니라 동료와의 교류에 의해 비인간적 현실을 변혁하는 길도 열리게 된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고령자의 지혜나 경험이 살려지고, 중년·청년들의 존경을 받게 되어 삶의 의욕이 증대된다. 그런 점에서 노년기의 신란이 제기한‘정정취’론은 분석·격차를 축으로 하는 오늘날의 고령화 사회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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