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경속에 깃든 상처, 그곳에 수많은 별들이 쏟아진다.

(동양일보)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내가 내딛는 발걸음과 그 발자국이 헛되지 않기를, 세상의 모든 새로움에 경배를 하고 앙가슴 뛰는 설렘으로, 순수의 마음과 열정으로 희망의 길을 만들 것을.

그대를 만날 때 기도하라. 우리의 사랑, 우리의 우정, 우리의 그 언약 영원히 변치 말자고, 기쁘거나 슬플 때 아프거나 방황할 때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힘이 되자고, 손 내밀어 함께 가자며.

일을 할 때 기도하라. 고단하고 팍팍한 삶일지라도 나의 일, 나의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누군가의 빵과 포도주가 되도록 따뜻한 경쟁, 아름다운 풍경 깃들도록.

연풍향교 명륜당 풍경
연풍향교 명륜당 풍경

 책을 읽으며, 밥알을 씹으며, 커피를 마시며, 영화를 보며, 노래를 하며 기도하라. 이 모든 극적인 순간을 위해, 나 자신의 신화를 위해, 삶의 여백과 불멸의 향기를 위해….

괴산 연풍길을 걸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연풍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자연 속에 있으며 역사의 심연과 함께 예술의 꿈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렇지만 모든 풍경 속에는 상처가 깃들어 있다. 연풍이 그러하다. 연풍은 아래로 문경새재와 이화령, 위로는 괴산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산속의 마을이다. 그 옛날 천주교 전파를 위해 힘쓰던 교인들이 은거를 하거나 이동할 때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순교자의 정신이 깃든 연풍성지
순교자의 정신이 깃든 연풍성지

 1801년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을 탄압했던 이른바 신유박해 이후 교인들은 은거할 곳이 필요했는데 연풍도 그런 곳이었다. 탄압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이윽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됐는데 추순옥․이윤일․김병숙․김말당․김마루 등도 이곳에 은거하다 처형당했다. 한국 천주교 103명의 성인 중 한 사람인 황석두(1811~1866)의 고향도 이곳이기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연풍을 성지로 정하고 성역화 사업을 하였다. 연풍초등학교 옆의 향청(鄕廳)을 매입해 이 일대를 신앙의 보금자리로 만든 것이다.

옛 연풍향청. 지금은 천주교에서 신앙의 성소로 사용하고 있다.
옛 연풍향청. 지금은 천주교에서 신앙의 성소로 사용하고 있다.

 연풍향청은 조선시대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해 ‘유향소’라는 이름으로 설치한 곳이다. 1489년(성종 20년)에 향청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지방관의 감독 하에 운영되었던 자문기관이었다. 이곳에서는 풍기문란을 단속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세금관리와 인재추천 등의 업무를 맡았었다. 세월이 지나 경찰서 주재소와 지서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3년 3월부터 천주교 연풍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연풍현감으로 부임했던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연풍현감으로 부임했던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가 연품현감으로 부임했다. 단원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리며, 무엇을 꿈꾸었을까. 안타깝게도 그가 그린 수많은 작품 중에는 연풍현감으로 있으면서 그린 그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연풍의 절경과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을 화폭에 담지 않았을까. 하늘과 땅과 자연과 사람들의 풍경을 앙가슴 뛰는 마음 담아 그렸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닥나무를 재배해 한지를 뜨는 한지마을이 있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 비단보다 더 귀하고 오래가는 한지를 만들어 온 마을이다. 마을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우물과 정자와 돌담길이 오종종 예쁘다 한유롭다. 오래된 것은 모두 아름답다. 삶의 향기 가득하다.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잇따르고 있는 연풍성지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잇따르고 있는 연풍성지

 잘 다듬어진 성지를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초등학교 운동장의 우람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구술치기와 고무줄놀이를 즐기고 있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풍경을 품고 마을과 향교를 한 바퀴 돌아 수옥정 폭포에 다다랐다. 20m 높이의 수직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웅웅거린다. 젊은 남녀들은 절벽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쏟아지는 폭포의 짜릿함을 즐긴다. 햇살이 물살과 함께 합궁을 하더니 눈부시게 부서진다. 나그네도 부서지는 물살에 마음을 맡겨본다.

구슬처럼 쏟아지는 수옥정폭포
구슬처럼 쏟아지는 수옥정폭포

대자연의 장엄함에 매료된 적 한 두 번 아니지만 그 때마다 신의 자비를 느낀다.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그 신비로움과 절경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확인한다. 연풍의 초가을 빛이 오지게 맑고 푸르다. 밤이 되면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것이다. 그 속에 있는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되는구나. 무량하다.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사진작가,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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