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일본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오늘날 세계 규모로 조용히 진행 중인 고령화 사회는 인류가 처음 체험하는 ‘인생 100년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노인은 일반적으로 존경받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노인을 더러운, 느린, 냄새나는 존재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어느 저명한 작가는 이러한 일본사회를 ‘혐노(嫌老)사회’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고 2014년에 공개된 한국영화 ‘수상한 그녀’에서는 한국의 대학생들도 노인에 대해 비슷하게 말하고 있었다. 한편 노인 자신도 긴 노후를 어떻게 살아야 될지 당황하고 고민하면서,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삶의 태도와 철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노후에 어떻게 살고 죽어야 좋을까?

유교의 ‘실학’(수기치인修己治人,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주제로 2009년 가을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개관된 ‘실학박물관’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쿠마자와 반잔(熊澤蕃山, 1619- 91)과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 1723-89)의 두 사람이 전시 · 소개되어 있다. 반잔의 초상화와 그가 스스로 쓴 “서월경운(鋤月耕雲), 산림경제(山林經濟)”의 글(복사본)은 박물관에서 의뢰하여 내가 일본에서 보낸 것이다. 그 반잔은 각 세대에 어울린 삶의 태도를 “어려서 배우고, 자라서 행하고, 늙어서 가르친다.”고 말했다. 늙은 인간의 책무는 다음 세대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있다.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서월경운(달을 가래질하고 구름을 간다)”이라는 말처럼 천지자연의 조화(造化)와 함께 일하고(共働) 보다 나은 세계와 미래를 창출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 이것뿐이다.



1. 인생 100년 시대의 도래

일본은 지금 2008년의 총 인구 1억 2808만 명을 정점으로 유래가 없는 대규모 인구급감 경향에 직면하고 있다. 추계에 의하면 100년 후의 총 인구는 3분의 1정도까지 줄어든다. 한편 65세 이상의 고령자 비율이 25%을 넘고 세계 최첨단을 가는 ‘초(超) 고령사회’=‘노인대국’이다. 2017년의 통계로는 평균 수명은 세계적으로도 톱클래스가 되었으며, 남성 80.98세, 여성 87.14세로 ‘인생 80년 시대’를 이미 달성했다. 100세 이상의 장수자(長壽者)도 6만7824명(그 중 여성이 88%). 통계가 시작된 1963년의 153명과 비교하면 무려 443배로 엄청나게 증가한 셈이다.

최근 몇 년간에 노후의 삶에 관한 책과 잡지의 출판이 잇따르고 있다. 인생의 종언에 대한 사전 준비활동인 ‘종활(終活)’ 붐을 거쳐서 요즘은 초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여 노인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노활(老活)’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우리 일본인은 앞으로 ‘인생 100년 시대’를 살아야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고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장수를 위한 건강법과 사회적인 교제의 방법, 간호와 양로원 문제, 연금과 재산관리 등 구체적인 생활에 관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노년기에 바람직한 정신세계나 철학이 거론되는 경우는 드물다.



2. 현대 일본의 답답함과 살기 힘듦

 2018년 6월 일본정부의 ‘인생 100년 시대 구상회의’(의장 아베 신조 수상)은 장수사회 · 저출산고령화 사회를 대전제로 ‘사람 만들기 혁명’ 기본구상을 결정했다. 고령자에 관해서는 충실한 ‘인생 100년 시대’를 위해 재고용의 촉진, ‘평생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 확보 등을 내세웠다. 일하는 노인을 구가하는 ‘평생 현역’이나 정부가 제창하는 ‘1억 총활약(總活躍) 사회’라는 말에도 볼 수 있듯이 일본인의 마음속에는 나이든 후에도 건강하게 움직이고 돈을 벌고 일하기를 원하는 전후(戰後) 일본 특유의 ‘회사사회(會社社會)’적 가치관이 깊이 스며들고 있다.

종래의 ‘회사인간(會社人間)’, ‘기업전사(企業戰士)’ ‘맹렬사원(猛烈社員)’ 혹은 회사의 가축을 의미하는 ‘사축(社畜)’을 거쳐 근년에는 과중노동으로 인한 ‘과로사(過勞死)’, ‘과로자살(過勞自殺)’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인격 전체가 노동에 묶여버리는 ‘전인격노동(全人格勞働)’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인생의 일부이자 수단에 지나지 않는, 생활을 풍요롭게 해야 할 ‘노동’이 몸과 마음을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피폐시키고 인격을 파괴해 버린다.

한편 노후에 일본을 버리고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로 이주하는 ‘탈출노인(脫出老人)’도 적지 않다. 늙어서도 계속 ‘삶의 보람’이나 ‘평생 현역’, ‘1억 총활약’ 등등 항상 ‘움직이고 일하는’ 것을 강요당하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일본사회로부터의 탈출이다. 비록 노인들이 현지의 젊은 아가씨에게 속아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어도 답답하고 설 곳이 없는 일본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계속 산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오늘날만큼 ‘장수사회’와 인구 감소에 따른 ‘성숙사회’에 어울린 삶과 철학이 요구된 시대는 없다. 나이든 인간이 일하는 것 이외에 순수하게 ‘사는 것’ 자체를 즐기고 충실감 있게 해주는 삶 · 철학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3. 노년적 초월

‘인생 100년 시대’를 맞이하면서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것이 1989년에 스웨덴의 사회학자 라스 톤스탐(Lars Tornstam)이 제창한 ‘노년적 초월(gerontotranscendence)’이라는 노인론이다. 그에 의하면 노년이 되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물질주의 · 개인주의 · 역할에의 기대 · 사회적 평가 · 세간에 대한 배려 등)에서 이탈하고 물건이나 사회적인 것에 고집하지 않는 ‘집착초월’과 자기중심성이 줄어드는 ‘자아초월’을 거쳐 마지막으로 2원론적 세계관을 벗어난 ‘우주적 초월’에 이행하며 거기서 깊은 행복감을 맞본다고 한다.

이러한 ‘노년적 초월’은 동양세계에서는 별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지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방외(方外; 초세속超世俗)에서 노는 ‘은둔자’를 귀하게 여기는 고대 중국의 장자(莊子)라거나 도교의 천인합일관(天人合一觀)이라거나 송명유학(宋明儒學)에서 말하는 천지만물일체론(天地萬物一體論) 등이 있다. 우주적 차원의 초의식(超意識)에서 평안함을 얻고 집착 · 자아를 초월한 지상적인 자타(自他) 일체감에 노니는 점은 마찬가지다.

쿠마자와 반잔과 동시대의 유학자로 박학다식으로 알려진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1630-1714)도 역시 자연과의 일체감에서 생기는 일본판 ‘노년적 초월’을 논한 바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80세 때에 쓴 교훈서인 ‘낙훈(樂訓)’이다. 반잔의 노년철학에 언급하기 전에 먼저 에키켄부터 살펴보자.



4. 반잔 “늙어서 가르치다”의 의미

반잔은 오카야마번(岡山藩)이라는 큰 번에서 벼슬하고 32살 때 녹봉 3000석(石)의 가로(家老·에도시대 무가(武家)의 가신(家臣)들 중 최고의 직책.)격에 발탁되어 번의 행정을 주도했다. 구휼 · 치수 · 교육 사업에 많은 실적을 올렸으나 번 내부에서 질투를 받고 막부에게도 위험인물로 간주되면서 38살로 은퇴했다. 막부의 감시 아래 각지를 옮겨 살았다. 그 동안에 사색에 침잠하며 53세 때 주저인 ‘집의화집(集義和集)’을 출판하고 72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서를 계속 발표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행하던 강권정치의 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당시의 소비문화와 자연파괴에 경종을 울렸다. 나카에 토주(中江藤樹, 1608-48)로부터 양명학을 배운 반잔은 이상정치의 실현을 추구하다가 번번이 좌절되고 돌아다닌 공자나 왕양명과 같이 하늘로부터 유교의 이상을 끝까지 추구하도록 형벌을 받은 ‘하늘의 육민(戮民)’(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편)로서 평생을 살았다.

유교의 이상주의를 숭상한 반잔은 “어려서 배우고, 자라서 행하고, 늙어서 가르친다.”고 말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세 가지 변화’에서 “참고 배우는 젊을 때의 낙타─공격적인 실행에 뜻을 두는 장년기의 사자─노년에는 만물을 모두 긍정하고 즐기는 어린 아이”라고 말했지만, 반잔은 늙은 인간의 역할, 존재 의의를 ’가르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어려서 배우고 자라서 실행하며 늙어서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과 어긋난 사람을 국적(國賊), 혹은 밥도둑(穀賊)이라고 부른다. 늙어서 현역을 물러가고 고향에 돌아가서 자제와 이웃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늘에서 내려주신 생명 · 정신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을 불곡(不穀)이라고 하는 것이다.”(‘논어소해論語小解’, 헌문憲問)

반잔은 “나에게는 제자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 스스로 ‘스승’이 되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스승을 자임하는 마음에 교만함과 자기만족이 생기고 수기(修己)의 학이 아니라 입신출세를 위해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학문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반잔이 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 동시에 배우는 것이라는 교육의 진수(眞髓)이다.

“학문이란 일부로 남 아래에 서는 것을 배우는 데 있다.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어린이의 마음을 배워야 된다. 스승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제자가 되는 것을 배워야 된다. 이렇게 배우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아버지가 되고 참된 스승이 될 수 있다.”‘『집의외서集義外書’, 권3).

남의 밑에서 배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세상 사람들과 힘을 합쳐 천지조화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집의화서’, 권4) 반잔이 “늙어서 가르친다.”고 말한 뜻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늙어서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지식 · 경험을 연소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친다”란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가? 천지가 만물을 낳고 낳는 ‘조화의 신리(神理)’를 배워서 천지자연 · 조화의 작용에 합류하고 보다나은 사회의 형성과 다음 세대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함께’ 힘을 다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5. 조화 참찬(參贊, 참가 · 찬조)의 철학

기타의 유학자와 달리 현실 정치의 실제와 수라장을 체험한 반잔에게 일관되어 있는 것은 하늘 · 땅 · 사람이라는 3극이 일체적 관계 속에서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의 인간에게는 적극적으로 천지조화(天地造化)의 작용에 참여하고 조력하는 책무가 부과되어 있다는 강한 신념이다.

“천지의 덕도 사람에 의해 나타나고, 신명의 위력도 사람에 의해 더해진다. 5척의 몸으로 조화를 도와야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집의의론문서集義義論問書’, 3)

‘중용(中庸)’에서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이라고 하듯이 천지조화의 작용에 인간이 합류해야 비로소 전우주의 질서가 제대로 유지되고 천지 · 만물의 생생번영(生生繁榮)이 이루어진다. 인간의 역할은 조화의 작용에 합류해서 그것에 힘을 보태주는 것이다. 반잔이 ‘농(農)’의 생활과 실천을 강조하고 ‘호오(好惡)가 없는 마음’의 필요성을 거듭 말한 것도 조화 참찬(참가 · 찬조)의 철학에 기초한 것이다.

젊었을 때 농촌에서 겪은 굶어죽기 직전의 궁핍생활에 기초한 반잔의 농업 중시론=무사 토착론(무사의 농촌 거주와 농업 종사)은 현실무시의 우활한 논의 내지는 복고주의로 비판되기 일쑤이다. 위정자가 앞장서서 농경생활을 해야 된다는 주장은 사회정책론임과 동시에 인간의 바람직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천하의 일은 농사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효경소해孝經小解’, 1) 농업의 가치는 천지의 은혜와 인간의 노동이라는 하늘 · 땅 · 사람 셋의 공동(共働)에 있다.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삼극(三極)에 하나가 빠져도 조화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나기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중용소해中庸小解’, 상上). 농업이란 인간이 천지자연에 조력하고 함께 힘을 합쳐서 행하는 공동 작업이자 인간의 조화참찬의 기본적 모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잔은 “정치는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인심이 바르지 않을 때는 조화를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효경외전혹문孝經外傳或問’, 1) 천지의 조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인심이 바른 것”이 요구된다. 바른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호오(好惡)가 없는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자기무화(kenosis)’와 비슷하게 반잔이 말하는 ‘호오가 없는 마음’은 모든 일마다, 사물마다, 생각마다, 때마다 구체적인 장면에서 좋고 싫은 감정을 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깥 사물에 의해 마음이 끌리는 것으로 존재에 내재하는 생생(生生) 고유의 조화의 활동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스승인 나카에 토주(中江藤樹)는 “종고 싫음의 색깔을 마음을 남기지 않는다면 버들은 녹색 꽃은 홍색”이라고 말했다. 호오가 없는 마음이란 천지조화의 활동과 우주자연의 필연성─춘하추동, 바람과 비와 추위와 더위, 사생과 순역, 부귀와 빈천, 복택과 환난, 장수와 요절─이 나타남을 긍정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더하지 않고서 그대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일, 모든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불인(不仁)이니 천지조화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집의화서’, 권13) 인간은 ‘호오가 없는 마음’이 되어야만 비로소 천지조화의 작용을 알아서 그것에 합류하고 조력할 수 있다.



6. “서월경운鋤月耕雲,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우주와 인간세계

반잔에게 배울 만한 노년철학이 있다고 하면, 스피노자의 이른바 ‘영원한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와 비슷하게 죽은 후 미래에도 영원토록 한없는 대우주를 날아다니면서 천지의 조화를 돕고 다음 세대의 행복하게 기여한다고 하는 웅대한 정신일 것이다. 반잔은 이렇게 말했다.

“사후에는 만물을 생성하는 음양의 신이 되고 천하(普天率土)의 조화를 돕자. 동이(東夷) · 남만(南蠻) · 서융(西戎) · 북적(北狄)의 어느 한쪽을 편애하거나 고작 100년쯤의 국가의 성쇠 따위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천지만물의 근원인 태허(太虛)에 마음이 돌아가면 12만 9600세를 한 살로 보고 천지의 수명조차 짧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일본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고작 50년의 수명 사이를 만나는 세계와 사건에 웃고 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집의화서』, 권12).

인생 50년이라 일컬어지던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 에키켄과 같이 84세의 장수를 누린 난학자(蘭學者)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은 세상을 떠날 전년에 이렇게 한탄했다. “젊었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당대의 일 등을 함께 이야기할 상대도 없다. 무엇을 해도 쓸쓸함이 짝이 없어 하나도 재미가 없다. 무리하게 장수를 바라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늙음이 괴로운 줄을 모르는 것이다.”(‘모질독어耄耋独語’). 노년기 특유의 ‘노년적 초월’도 에키켄이 ‘낙훈’에서 보인 천지일체에서 생기는 즐거움도 여기에는 없다.

 겐파쿠가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번역해서 ‘해체신서(解體新書)’(1774)를 펴낸 것은 일본이 가졌던 세계질서 · 세계관이 중국 모델부터 서구 모델로 전환된 것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겐파쿠는 지식인으로서 일본에서 최초로 서구근대에로 모델체인지를 이루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래 서구 근대를 추구하고 그 생활양식 속에서 살면서 오직 일만 하는 인생에 지치고 기나긴 노후를 힘겨워하는 현대일본의 노인들도 역시 200년 전의 겐파쿠와 같은 한탄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일까?

에키켄이 강조한 천인일체의 즐거움이나 자연의 찬미, 독서의 즐거움─이것만이라도 충분히 현대적인 노년철학이 될 만하다. 하지만 자연찬미나 독서의 즐거움은 자기 혼자만으로 닫혀버리는 것으로 완결될 세계이다. 이것으로 현대일본의 노인들은 정말로 만족할 수 있을까?

최근 10년간에 일본에서는 노년기를 맞이한 저명한 학자 · 작가들이 노후의 고독을 권장하는 ‘혼자님’이나 ‘최상의 고독’, ‘고독의 권유’ 등 일련의 책들이 출판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에키켄의 경우도 그렇지만 그들은 주변 사람과 책의 출판 · 강연이라는 사회적 행위를 통해 일반세상과 굳게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아름다운 말로 꾸며진 고독의 권유나 즐거움을 일반노인들은 그대로 믿거나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주위를 수많은 친구 ‧ 아는 사람 · 독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들과는 달리 거기에 출현하는 것은 고독지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7. 반잔의 노년철학

반잔이 말하는 것은 보통세상 사람들과 같이 배우고 더불어 힘을 합쳐서 천지자연의 조화와 함께 일하며 인간사회의 행복실현을 도와주는 “서월경운(鋤月耕雲),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세계이다. “성인은 속인(俗人)과 함께 놀고 대중(大衆)과 함께하는 것으로 대도(大道)를 삼는다.” (『집의화서』, 권5). 자기 즐거움에 폐쇄된 지족안분(知足安分)의 세계, 자족(自足)의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세계에 활짝 열어놓고 사회의 안녕과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면서 타자와 맺어지고 함께하는 활동 속에서 보다 큰 자기완성을 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노년기를 어떻게 살고 죽어야 되는가?

반잔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임종의 자리에 눕거나 혹은 사후에조차 다음 세대를 위해 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새로운 세계,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내는 활동에 참여하는 정열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한다. 비록 사회적 실천에 참여할 수 없어도 내면의 정신적 범위 안에서라도 그 방향성은 늘 그래야 된다.” 이것은 동시에 늙은 인간이 다음 세대 젊은이들에게 몸소 “가르칠” 철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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