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희(성균관대학교 강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상) 천년 미래를 바로잡을 길—



●사화 속에서 태어나다.

퇴계 이황(1501~1570)이 태어난 시대는 사화시기였다. 퇴계가 태어나기 전 1498년의 무오사화, 태어나서 1504년의 갑자사화 그리고 19살인 1519년에의 기묘사화, 45살인 1545년의 을사사화이다.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학자들 가운데 도의에 뜻을 둔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의 환란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 이는 땅이 좁아 사람들이 경박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스스로 하는 학문도 다하지 못함이 있어서 그렇다. 다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 학문이 지극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너무 높게 자처함과 시대를 헤아리지 않고서 세상을 경영하고자 함이다.”(이광호, ‘퇴계집’) 퇴계는 도에 뜻을 둔 학자들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원인은 “학문이 지극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너무 높게 자처함”과 “시대를 헤아리지 않고서 세상을 경영하고자 함”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하여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퇴계는 아마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은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양진(養眞)’이란 두 글자로 화두를 삼다.

퇴계는 34세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49세까지 공직자로서 직장생활을 했다. 사직을 43년부터 청하긴 했지만 다시 소환되어서 직분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50년 8월 가장 의지했던 넷째 형 이해가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지로 이동 중에 돌아가셨다. 그해 11월 제자 조목에게 퇴계는 은거하여 여생을 학문에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퇴계의 저작은 대부분 이 후반기에 완성되었다. 퇴계가 학문을 시작할 당시에도 사화의 어지러움을 겪으면서 학문의 방향성을 물었고, 또 공직자로서 살면서도 계속 내 삶을 어떻게 어디로 이끌어가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퇴계가 46세에 집을 지어 그곳의 이름을 양진암(養眞庵)이라 하였다. 양진암이란 진리를 기르는 암자라는 뜻인데, 양진 이 두글자를 “천 리 밖 친구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故人千里如相識)”라고 시를 지었다. 어쩌면 사화 속에서 삶의 방향을 늘 고민하던 퇴계는 ‘양진’ 이 두 글자를 화두로 삼아서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천년을 준비하다.

51세 퇴계는 계상서당을 짓고 본격적으로 서당을 열었다. 이것이 퇴계가 ‘양진’이란 화두를 현실에서 구현한 모습이다.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강학을 시작하다(淸明溪上書堂)’라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맑은 시내는 몇 겹의 안개를 둘렀는고?(淸溪環繞幾重烟) // 시냇가에 집 지으니 겨우 작은 배만 하네(結屋溪邊僅若船) // 보잘 것 없는 규모에 사람들이 웃지만(造次規模從客笑) // 조용하고 후미진 형세 나와는 잘 맞는다네(幽偏形勢得吾緣)…중략…유림의 도 본래 속세에 어울리기 어려우나(儒林道故難諧俗) // 남자의 몸으로 한 푼 가치 없는 이 많다네(男子身多不直錢) // 한스럽게도 일생 도를 아는 이 만나지 못해(恨未一生逢有道) //내 마음 천년을 바로잡을 길 없다네(此心無路訂千年) (이광호, ‘퇴계집’)

퇴계는 왜 자신이 서당을 열었는지에 대해 ‘천년 미래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 제자들도 많아졌다. 그들과 수많은 시를 화답한다. 주고받은 시에서 나라와 학문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이 시 직전에 지은 ‘개탄하다(有歎)’라는 시의 서두에서는 “지금 세상에 누가 첫째가는 사람 되어 굳센 척추와 강철 같은 뼈로 천년 사업을 담당하랴!”라고 읊고 있으며, 52세 4월에 지은 ‘4월 초하룻날 계상에서 짓다’라는 시에서는 “오로지 천년 전 태어난 성인이 있으니 가슴 속 생각이 나와 어울리네.”라고 읊고 있다. 자기 자신을 ‘천년 사업’을 담당할 사람, ‘천년 전 태어난 성인’과 마음이 같은 사람으로 확인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있다.(이광호, 115) 퇴계가 준비한 천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학문을 통해 나라의 천년을 구할 수 있을까? 퇴계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지금 내 삶에서 어떤 것을 화두로 찾아야 할까?



●천명도, 사람에서 우주를 품다.

퇴계는 추만 정지운(1509~1561)의 ‘천명도’를 보고 천년을 준비할 수 있는 영감을 받았다. 추만과 함께 천명도를 수정해 53세에 ‘천명도설’에 서문을 쓴다. 그 서문의 내용에는 이 천명도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적혀있는데 객과의 대화가 재미있다. 객이 “도는 성인만이 지을 수 있는데 당신이 성인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퇴계는 답한다. “이것은 그대가 농부를 나무라며 ‘그대가 신농씨(처음으로 농기를 만들어 가르친 임금)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성인을 공부하는 사람이 도설을 그리는 것은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각기 떳떳한 일이다. 말이 취할 만하면 취하는 것이니, 군자가 사람을 위함은 이와 같은 것이다.”(‘퇴계집’ 권41) 객은 바깥에서 사람을 보려 했고, 퇴계는 사람 중심에서 바깥을 말한다. 퇴계는 천명도는 태극도를 보완해야 하기에 필연적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태극도는 하나가 나뉘어 다섯이 되었다는 층위를 설명한 것이지만 천명도는 인간에 모두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태극도는 우주의 입장에서 인간을 그렸다면 천명도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주를 설명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중국유학과 한국유학이 분별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고대에서부터 ‘천’에 제사를 지내는 민족이었기에 원리적인 태극보다는 인간에 온전히 내재되어 있는 ‘천’을 우선시했을 풍토가 기인한다.



●영혼과 감정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이 천명도를 계기로 퇴계는 고봉 기대승(1527~1572)과 근 8여년에 걸쳐 사단칠정의 논쟁을 벌인다. 나는 이 논쟁을 ‘영혼과 감정의 분리’를 위한 논의이다. 초월적 영혼(性)과 나의 영혼(虛靈)을 감정으로부터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가 이 논의의 핵심이다. 그래서 퇴계는 영혼과 감정을 같이 보지 말 것을 주장한다. 그 논의의 결론으로 “사단은 리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나온다.”라고 정의 내린다. 영혼은 리에서 나오고, 감정은 기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나의 영혼을 통해 주체적으로 나온 선택인가? 밖의 영향으로 인한 선택인가?’이다. 인간의 매 순간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무의식중에 의식중에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혼의 출발인 리는 무엇인가?

“일찍이 옛사람과 우리의 학문이 차이 나는 까닭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리자를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리자를 알기 어렵다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대략 알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참으로 알고 신묘하게 깨달아 완벽에 이르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한형조, ‘성학십도’)

퇴계가 43세에 지은 ‘진리를 기른다(養眞)’는 화두는 리자의 참 의미를 알려는 노력이었다. 그 리자를 진정으로 알 수 있는 방법으로 퇴계는 영혼과 감정의 분리를 말하고 있다. 그것이 사단과 칠정을 구분한 이유이다. 이 분리의 노력이 계속 되어야지만 어느 순간 영혼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계는 이러한 노력이 힘들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남을 자기로 아는 병(認物爲己)

퇴계는 우리는 하나라고 할 때, 가장 위험한 병통이 ‘남을 자기로 착각하는 병’이라고 하였다. 남들의 꽁무니를 쫓아, 권력과 매스컴이 이끄는 대로, 타인의 시선에 압도되어,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고, 태엽에 따라 노래하는 자동인형으로 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었다. 나의 본성은 무엇인지, 가능성과 조건은 어디쯤인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묻는 법을 잊었다.(한형조, 196) 퇴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과 가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너의 영혼을 어디다가 팔았느냐?”

계속 온 힘을 다해 뛰어가는 사람이 있다. 쉬지 않고 계속 뛴다. 주위에서 묻는다. “왜 그렇게 힘들게 뛰십니까?” “성공하려구요.” 그 성공은 돈일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만을 바라보며 뛰면 사람은 거기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없어지고 남들이 바라는 자세로 계속 뛰고 있다. 왜 뛰는지 모르면서. 대일 항쟁기(일제 강점기) 윤치호(1865~1945)는 그 당시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받아들여 ‘조선독립 불가능론’을 말한다. 그는 조선이 힘이 약하기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윤치호의 논리대로라면 강도를 당해도 약하기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간을 당해도 약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의 미투운동은 성립될 수 없다. 윤치호의 성공은 강자가 되는 것이었다. 윤치호의 삶은 영혼을 버리고 감각만을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퇴계는 말한다. “영혼을 발견하고 영혼이 바라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그 가는 길에 성공이 있습니다.”



●자기치료(修身).

수신(修身)이란 몸을 닦는다는 말이다. 몸을 닦는다는 것은 그 몸에 대한 치유(修)를 말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말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말은 나 스스로가 ‘치유(修身)되어야 가정의 화목을 경영하며, 나라를 질서를 구축할 수 있고, 그러면 온 세상에 밝은 덕을 밝힐 수 있다. 몸을 닦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받은 영혼을 찾는 노력이며, 이 영혼이 밝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초월적인 영혼(性)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닦아내는 치유의 과정을 거쳐서 나의 영혼과 만나야 한다. 자신의 에고에 사로잡히지 않고, 외계의 소음을 차단할 때, 마음의 덕성은 자신의 본래 빛을 드러낼 것이다. 이것이 자각이며 경(敬)이다.(한자경, 278)



—(하) 세대간 갈등에서 세대간 상생으로—

조선을 경험한 독일의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신부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저서와 조선을 촬영한 영상을 남깁니다. 두 번째로 조선을 찾은 그는 독일에서 영상 촬영을 위한 장비를 들여와 본격적인 기록을 시작했다. 베버신부는 “문화사적으로 가치 있는 많은 것들을 사라지려는 마지막 순간에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아울러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이유를 일제 강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는 35년이 아니라 1876년에 이루어진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에서부터 69년이라 할 수 있다. 근 70여년의 세월동안 일제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해방이후 72년이 지났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린 무얼 얻고 무얼 잃어버렸나? 그 중에서 특히 심하게 훼손되어 버린 부분을 찾아보자면 조상과 어른에 대한 감사와 존경하는 모습인 것 같다. 요즘은 경노사상이 혐노사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른들을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베버신부가 감동받았던 조선에서는 어떠한 세계관으로 살았었는지 살펴보겠다.

조선의 세계관을 잘 정립한 학자는 퇴계 이황이다. 퇴계 68세에 17세 임금인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를 보면 조선의 세계관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열 개의 그림과 그림에 대한 해설로 되어있다. 그 중 첫 번째 ‘태극도’는 우주관을, 두 번째 ‘서명도’는 인간관을 표명한 글입니다. ‘태극도’는 태극으로부터 만물이 생겨나기까지 그림이 있다. 여기서 태극이란 만물을 생성하는 자연을 말한다. 그 안에 사람도 포함된다. 그리고 ‘서명도’에는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른다(天稱父地稱母)”라는 내용이 있다. 이 두 그림에서 살펴본 세계관은 ‘우주적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태극에서 생겨난 피조물들은 모두 각자의 태극을 가지고 있고, 하늘이 아버지, 땅이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부모・형제・공동체를 배 속에서부터 경험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우주적 가족공동체’에서 가족은 성스러운 질서인 태극을 체험할 수 있는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관계는 부모의 ‘따스함’이다. ‘관계’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저절로 생성되는 ‘따스함’을 기준으로 삼는다. 오륜이라는 덕목들을 단지 도덕적인 원리나 원칙보다는 우주적 질서와 연결된 ‘성스러움의 정감’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오륜은 초월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성스러운 질서’로서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천도로 사람이 태어나 사회를 경험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정감에 기초한다.

오륜 중 부자유친의 효가 가장 중요한 사상이었다. 퇴계에게 마을사람들이 향촌의 규칙인 ‘향약’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향약을 만든 퇴계는 또 마을사람들 개개인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향립약조(鄕立約條)’이다. 이 약조의 1항이 “부모에게 불순한 자(불효의 죄는 국가에 떳떳한 형벌이 있으므로 우선 그 다음 것을 거론함)”이다. 효를 개인의 차원에서 하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마을에서, 국가에서 법으로써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약조를 통해서 국가에서, 또 마을에서 무엇을 중요시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을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해서 만든 약조이니 이러한 생각이 그 당시의 보편적 관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효사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요? 저는 종교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에서 종교 기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한반도에는 신석기 시대(약 1만년 전)의 유물인 지석묘(고인돌)가 그 예다. 신석기시대 한반도에서는 돌 밑에 조상의 시체를 안치했다. 조상을 잊어버리지 않고,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조상숭배의 관념이다. 중국 대륙에는 지석묘가 없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석묘의 70%가 집중되어 있다. 고대의 기록에 한반도인들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살던 동이문화권에만 지석묘가 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동이전(‘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扶餘), 예(濊), 진한(辰韓)의 제사문화를 알 수 있다. “‘부여’는 정월에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국민들이 대회를 열어 며칠씩 음식과 노래와 춤을 계속하며, 그 이름을 영고라 하였다. ‘예’는 언제나 시월절에는 천신에게 제사했는데 밤낮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니 그 이름을 무천이라 하였다. ‘진한’은 오월에 파종을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했는데 군중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밤낮을 헤아리지 아니했다. 춤출 때엔 수십 인이 함께 일어서서 서로 따르면서 땅을 디디며 손발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며 서로 장단을 맞추는 것이 탁무와 비슷했다.” 이 당시 한반도에서는 조상의 최고신인 상제(上帝)를 믿었다고 한다. 이 제사의 모습은 특정한 인물만 제사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제사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제사의 형식은 노래와 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이 조선에서는 제사라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퇴계는 조상신이 혼으로 존재함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말했다. “불이 꺼진 뒤에 화로 안에는 오히려 훈기가 남아 있어 오랜 뒤에야 바야흐로 다 없어지고, 여름날 해가 진 뒤에도 남은 열기가 오히려 남아 있다가 밤이 되어 음기(陰氣)가 왕성해진 뒤에야 바야흐로 식어버리니 모두 한 가지 이치입니다.”(‘퇴계전서’, 답남시보) 죽은 영혼은 시나브로 소멸되기에 조상신이 정말 제사에 함께 계신다고 여긴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의 신주를 모셔오는 것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러한 자세를 알 수 있다. 퇴계는 상례에서 부모의 신주를 만드는 절차에 관해서 말한다. “정침(正寢, 주무셨던 방)에 빈소를 차리는 것은 그 神으로 하여금 생존하던 곳에 편안히 있게 하려는 것이다. 산야에 장사를 마치고 평토를 끝내자마자 신주에 글자를 쓰는 제주(題主)를 끝내고 자제로 하여금 봉묘를 돌아보게 한 뒤 곧바로 반혼(返魂)하는 것은 아마도 신혼(神魂)이 흩어져서 의지할 데가 없을까 염려되므로 진작 의귀하도록 즉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 편안히 있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의 마음입니다.”(‘퇴계전서’, 답조기백문목) 신혼이 평소의 거처에 머무르게 하는 배려는 조상신이 신주에 의귀하셔서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상제를 기반으로 한 효사상은 신석기시대의 지석묘에서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어 내려오던 종교성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가장 훼손이 되어 버렸을까? 조선시대에 종교란 단어는 없었다.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세워진 정교일치의 사회였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조선에서는 종교라는 단어 대신 도덕이란 단어가 쓰였다. 도덕은 오륜이란 관계성에서 형성된 단어다. 우리는 종교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의 단절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상제관을 기반으로 한 영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계’가 기본이 되는 ‘우주적 가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수 있었던 영성의 상실이 지금의 틀딱충이란 단어를 만들어 낸 것 같다. 조상신인 상제를 섬기는 문화는 효사상과 함께 말해질 수밖에 없다.

퇴계는 왕에게도 ‘상제’를 대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특히 퇴계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시경’에 “‘상제께서 그대에게 내려와 계시니 그대는 주저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주저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상제께서 그대에게 내려와 계시니라.’라고 하였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의 주석이다. “배우는 사람이 평소에 이 말씀을 읊조리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마치 상제께서 실제로 그 위에 내려와 계시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사악함을 막고 진실 됨을 보존하는 데 도움 됨이 아마도 크지 않겠는가? 또한 의를 보고도 반드시 실행할 용기가 없거나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이 말을 음미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퇴계는 “매번 암송하고 음미할 때마다 가슴 깊이 감동을 주고 나약한 마음을 격동시킨다”고 말했다. 여기서 상제란 첫째 사악함을 막고 진실 됨을 보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이고, 둘째 의를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내어 결단을 내리게 해주는 존재다. 퇴계가 매번 벼슬을 사양할 때마다 높은 관직이 와도 한결같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결의는 아마도 이러한 영성이 있기에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퇴계에게 있어서 상제란 늘 의로움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주는 떨림을 주는 존재였고, 태극을 인간에게 닿게 해주는 궁극적 실체였다. 상제가 내려준 태극이라는 당위와 나의 존재가 겹치는 그 자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의 어떠한 결실이다. 의를 선택한 나의 결기가 혹 실행할 용기가 없거나, 이해득실로 마음이 흔들릴 때 상제께서 “주저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라”라는 말은 일상 속에 극기(克己)의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초월적인 힘의 의지인 것이다. 퇴계에게 상제는 너와 나 사이에 따스함에 깃들어 있으며, 따스함을 위한 집중으로 극기의 시간을 견뎌내어 얻어진 방울방울들의 결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상제에 대한 믿음은 일본 강점기에 종교라는 법률적 구분으로 상실됐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그 옛날의 정감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퇴계는 일상에서의 정감을 살피라고 말한다.

정감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조선조 가장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다. 퇴계와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이 8년간 편지로 벌인 논쟁이다. 이 사단칠정논쟁의 결과로 퇴계는 성학십도에서 ‘제6심통성정도’에 하도를 창작해 넣었다. 여기서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인 사덕(四德)의 단서가 되는 마음으로, 즉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한 정감을 말한다.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이다. 퇴계는 사단은 리(理)의 정감, 칠정은 기(氣)의 정감으로 구분해야 한다. 이 구분의 이유는 사단이 온전히 선하기에 칠정과 다르게 봐야 한다는 퇴계의 독창적인 구분인데, 이러한 논리는 맹자의 성선(性善)을 정선(情善)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다. 본성은 형이상학(理)의 논리적 차원이기에 선하다는 논리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 드러나는 정감(氣)의 선함은 현실의 악에 대한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윤사순 교수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서 존재와 당위를 일치시키는 가치상의 의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형이상과 형이하의 일치는 믿음이며 신념의 종교성으로 해석되어야 그 당시 퇴계의 의도를 짐작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용’의 “하늘이 명하여 주신 것이 본성이다(天命之謂性)”에서 본성으로 받은 덕이 인의예지이므로 사단은 하늘에서 내려준 성스러운 정감으로 일반 정감인 칠정과 구분된다는 퇴계의 말은 상제가 내려주신 태극의 본성이 내게 있으니 그 본성이 정으로 발현되면 형이상의 성선이 형이하의 정선으로 발현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단이 초월적 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면에서 일종의 ‘종교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을 확충해 나가는 수양은 “유아(有我)의 사사로움을 깨뜨리고 무아(無我)의 공변됨을 크게 여는 것”(‘퇴계전서’ 서명고증강의)이며, 인간이 사회와 만나면서 가질 수 있는 종교적 정감인 것이다. 이를테면 공공정감이다. 이 공공정감은 개인이 사회와 만나는 개입의 실천이다.

하도의 동그라미를 보면 인의예지의 본성과 청탁수박(淸濁粹駁)의 기질에 대한 구분에서 퇴계는 허령지각(虛靈知覺)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질과 본성의 나뉘는 부분에 지각과 허령(虛靈)이 있다는 것은 기질에 가리지 않는다면 나의 사단(四端)을 누구나 지각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허령은 텅빈 영성으로 오륜이란 공동체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갖게 되는 영성이다. 우주적 가족 공동체에서 영성으로 하여금 속(俗)에 사는 개인 누구나 다 성(聖)의 정감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보편성의 획득인 것이다. 또한 사단을 따로 구분한 것은 개인의 정감에서 공공(公共)의 정감은 위상학적 지형을 달리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공리(公理)가 자유’(‘스피노자’)라는 말이고 또한 한용운이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라고 하는 ‘복종의 자유’와도 상통된다. 퇴계는 집중[敬]을 강조하는데 집중 대상이 없을 경우 사라지는(불가능해지는)게 아니라(知覺未萌) 거꾸로 그 고유한 형식성 속에서 지속되며(虛靈不昧), 때로는 이로써 자의식의 성격을 변화시키거나 그 차원을 격상시키는 것이다.(‘집중과 영혼’) 집중을 통해 나 스스로가 비워진 빈방에 밝은 빛이 생기는 경지(虛室生白)까지를 말하고 있다.

나라는 한 사람에게서 사단이란 인식과 실천을 통해 장소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 수 있다. 우주적 가족공동체에서 나라는 구성원은 마치 홍익인간(인간을 널리 이롭게 해라)의 이념을 실현하는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집중의 내용이 형식이 되었을 때 나의 개체에서 장소감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효.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다. “하늘을 섬기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것(事天而事親)”이란 영성이 함께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것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정감이지 않을까? 이러한 정감이 살아나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란 단어를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우주적 가족공동체’의 느낌을 되살리려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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