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래공창신문 편집인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야마모토 쿄시(일본 미래공창신문 사장)
야마모토 쿄시(일본 미래공창신문 사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도덕규준이 있어야 된다. 옛 시대에 옛 도덕규범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롭다 시대란 21세기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제 세계는 한 사람의 반딧불 같은 언론이 순식간에 세계를 돌아다닌다. IT에 의한 정보전달 기능의 발달로 인해 언론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근현대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었으나 한편으로 인류 멸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궁극병기까지도 만들어버렸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기 때문에 이 현실을 먼저 직시하고 나서 21세기 인류의 방향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근현대의 패러다임은 ‘과학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과학 그 자체에 보편적인 철학은 없다. 과학을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여의봉처럼 착각한 데에 근현대의 잘못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의 진보는 불가역인 만큼 우리들은 과학의 선과 악을 어울러서 과학을 포월(包越)할 새 시대를 열어갈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고 있다. 그 사명을 다할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언론이다.

일찍이 인생 40년이나 50년이라고 말해졌다. 21세기는 인생 100년이라고 말해진다. 인류가 의학과 위생을 눈부시게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60세나 65세를 넘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노인’이라고 부른다. 현역을 그만두고 나서 30년, 40년 동안 계속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산다거나 취미만으로 살 수 있을까? 현대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직시하지 않는, 시각이 접어진 노인에게 미래는 없다. 부언하면 여기서 말하는 ‘미래’란 희망을 뜻한다.

노년세대는 가꿈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돼서야 발버둥 쳐도 이제 늦다. 그러기에 인간은 유년기, 소년소녀기, 청년기, 장년기에 올바르고 지혜로운 삶의 습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세대에 대해 인간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게끔 지도할 수 있는 것은 노년세대이다. 노년은 젊은 세대에 대한 무한의 책임을 지고 애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지금 살고 있는 노인에게 이러한 도덕을 이야기해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노인상을 나는 들을 귀를 가진 사람에게 먼저 전하고자 한다.

과학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다. 2000년 전의 고대세계와 대도시의 화려한 번영을 누리는 세계를 비교해 보면 고대인과 현대인은 격이 전혀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같은 뇌와 몸과 양심을 각각 가지고 있는 호모사피엔스임은 다를 바 없다. 호모사피엔스가 IT기술의 획기적인 진보와 장수를 실현시킨 반면으로, 핵무기에 의한 세계파괴의 위협, 지구환경의 심각한 악화에 따를 재해의 극대화, 세계에 400군데 이상 만들어진 원자력 발전에 의한 지구 오염과 같은 피하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노인은 체력으로도 지력으로도 날마다 쇠약해지기 때문에 장년시대처럼 정력적으로 활동하기는 힘들지만 지금까지 축적해 온 지적 재산이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안정된 재력도 있다. 장청년 세대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하거나 가정과 가족과 아이를 돌보거나 해서 일상생활에 쫓기고, 과학이 가져온 폐해적인 측면에 대응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청장년 시대를 경험해 온 노인들은 잘 안다.

노인은 스스로 걸어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부감할 지평에 도달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인류의 역사를 부감하면서 그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일’을 떠나서 자유로운 언론 활동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노인이야말로 세계의 위기 타개를 기원하여 외침소리를 올릴 의무가 있다. 오늘날 선진국의 노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비참함을 부모 세대에서 들어 익히 알고 있다. 전쟁이 얼마나 불모(不毛)한 것인가를 말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전쟁으로 돈벌이와 생계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역시 살아야 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 인격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다행히 그렇게 딱한 ‘일’에 종사하지 않는 노인들은 세계에서 비참한 전쟁을 없애야 된다고 소리 높게 외칠 의무가 있다. 지식층이라면 더욱 그렇다. 언론계에서 벌어먹었던 전직 신문기자나, 행정직으로 지적 노동에 종사해온 전 공무원이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하고 젊은이들의 인격 함양에 힘써 온 전 교사나, TV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환경문제로 경종을 울렸던 전 TV 관계자들이 노년이 되었다고 자위적 오락에 빠져 있어서야 되겠는가?

남은 시간을 헛되이 살면서 자기가 죽을 때까지 무사하게 살 수만 있다면 된다고 ‘난 몰라라’ 식으로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젊은 세대와 아직 오지 않는 장래세대가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행복한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감사할 줄 모르는 노인은 살 가치가 없다. 비록 병상에 누워 있어도 돌보아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합장하는 영혼을 가지는 노인은 한없이 아름답다. 건강과 외모를 유지하며 여행하고 친구들끼리 취미오락을 즐기는 것밖에 관심이 가질 수 없는 노인은 보기 흉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노인이 되어야 된다는 것은 옛 시대에도 새로운 시대에도 요구되는 노인의 규범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노인은 무상(無償)의 행위에 깨어 있어야 된다. 청장년 시대에는 노동과 급료를 등가교환(等價交換)해 왔다. 하지만 의식에 오르지도 않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 선인들, 동식물 등등의 덕을 받고 있으며, 노인 특유의 신체적 쇠퇴를 맞이하고 있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할만한 일이다.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은혜를 받고 있다. ‘보은’은 노인이 으뜸으로 유념해야 될 도덕규범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매문(賣文)’ 행위이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고민한 것 중 하나가 글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이상주의와의 갈등이었다. 지금 세상의 언론활동은 대부분 ‘매문’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자각하지도 않는 매문업(賣文業)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것은 영혼의 낮잠이다. 심지어 지록위마(指鹿爲馬) 식으로 권력자를 아첨하여 그 정책을 그럴싸하게 찬양하는 매문은 바로 혼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노인이 되어서도 매문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먹고 살자는 것인가?

깨어 있는 노인은 바로 언론활동이 21세기 지구의 문제 해결과 인류 구제를 위한 가장 중요한 ‘무기’이자 원동력임을 자각하면서 언론계의 정상화, 청정화, 공정화, 공공화에 노력해야 된다. 또 깨어 있는 노인은 양심적인 언론계의 공창(共創)과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가야 된다.

근현대에는 마치 돈이 만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돈은 생활의 수단으로서는 소중하지만 영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동아시아의 분단 상황을 해소해야 된다. 동아시아가 영혼의 자유에 눈뜨고 미래공창을 위해 연대하는 것은 긴요한 요청이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는 <영성적(靈性的) 일본의 건설>이라는 책에서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영성(spirituality)이라고 설파했다. 노인이야말로 영성에 눈뜨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맺어지고 연대하며 희망찬 지구를 함께 만들기 위해 일어서야 된다. 우리들은 국가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나라의 경제기반이 확립되지 않으면 자기 생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언론계는 마치 ‘경제’가 잘 되기만 하면 국가도 국민도 행복해지는 것처럼 말한다. 인간은 이코노믹 애니멀(경제적 동물)이 아니라 양심과 혼과 영성을 지닌 영장류이다. 영성을 발휘한 언론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에 노인이 이바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어린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혜를 돌려야 된다. 자기 어린 시절을 상기해 보면 좋다. 어린이는 온갖 가능성을 간작하고 있다. 그 어린이들과 더 많이 대화를 나누고 돈과 향락보다 아름다운 영혼이 더욱 진정한 세상의 보배임을 전할 의무가 있다. 어린이를 우습게보면 안 된다. 어린이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고 장래세대의 기수(旗手)인 어린이가 행복하고 제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인들은 지혜를 짜야 될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의 본질은 저출산에 있다. 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곧 어른이 만들어낸 오늘날의 이 세계가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른들 스스로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난 어린이가 바르고 밝고 명랑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지를 노인들은 그 언론활동을 통해 전해야 한다. 허나 언론활동이라고 해도 꼭 신문과 잡지와 서적 등을 집필하는 것만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보화시대의 무기로써 언론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노인들의 연대는 먼저 새로운 언론계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관건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 100년대인 만큼 노인들에게는 엄청난 사명과 책임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자각하시기를 바른다. 그러한 노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늘어나게 되면 그만큼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혐노(嫌老)의 풍조도 장차 해소될 것이다.

(번역: 원광대학교 연구원 야규마코토柳生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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