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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7. 괴산읍내 근대유산 골목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7. 괴산읍내 근대유산 골목
  • 변광섭
  • 승인 2018.09.13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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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지나 술 익는 골목길
괴산읍내 전통시장. 난장을 보는 재미 솔솔하다.
괴산읍내 전통시장. 난장을 보는 재미 솔솔하다.

지난 여름은 폭력적이었다. 온종일 도시는 뜨거웠고, 지칠 줄 모르는 열대야와

비 한 방울 없는 지루한 일상은 생지옥이었다. 초목도 그럴 것이고 바짝 타들어가는 논과 밭의 작물들은 더욱 고단했을 것이다. 텃밭에 심은 고추와 가지와 오이와 옥수수는 속절없고 댕댕이덩굴만 무성하니 근본없는 사내의 마음은 정처없고 헛헛했다.

옛 군수관사의 한옥 풍경
옛 군수관사의 한옥 풍경

여름의 끝자락에 단비가 대지를 적시면서 산과 들의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돌아보니 지난날의 가시밭길은 꽃길이었다.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가 꽃대를 들어 올리더니 골목길과 들녘 곳곳에 연분홍 물결 가득하다. 고추잠자리 푸른 하늘과 대지를 오가는 풍경 한유롭고 귀뚜라미 소슬하니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

왠지 9월에는 책을 읽고 싶고 시를 쓰고 싶고 여행을 떠나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게 그리 은밀하지도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9월에는 지나온 봄과 여름의 그것과 다른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깊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가을의 길목을 걷고 싶다. 내 마음의 여백을 만들고 내 삶에 향기가 나면 좋겠다.

근대문화유산인 옛 군수관사 솟을대문
근대문화유산인 옛 군수관사 솟을대문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바람과 햇살과 삶의 풍경을 가슴에 담기 시작했다. 괴산읍내의 근대문화유산 골목이다. 전통시장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자 솟을대문이 마중 나와 있었다. 솟을대문은 양반집 대문을 높게 만들어 가마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곳의 솟을대문은 3단으로 만들어 그 크기와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

옛날에 이 고을에 최부자가 있었다. 부농인데다 읍내에서 제법 큰 규모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모았다. 먹을 만큼 모으고, 벌을 만큼 벌었으니 지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1950년에 자신의 건물을 괴산군에 기증했다.

근대문화유산인 옛 군수관사
근대문화유산인 옛 군수관사

1919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전통 한옥양식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와 ‘ㅡ’자형의 사랑채, ‘ㄱ’자형의 안채가 있고 넓은 마당과 높은 돌담이 한옥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있다. 괴산군은 이 건물을 몇 해 전까지 군수 관사로 사용했다. 최근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지역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일양조장의 술독. 술도가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제일양조장의 술독. 술도가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자마자 술 익는 냄새 그윽하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의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술맛은 더욱 그렇다. 1930년대 초에 첫 문을 연 제일양조장은 말 그대로 괴산에서 제일가는 술맛을 자랑한다.

좋은 물과 갓 수확한 쌀을 쪄서 고두밥을 만들고, 누룩과 함께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술도가마다 전해져 오는 비법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누룩과 효소와 발효시간과 저장하는 공간의 환경, 그리고 술을 빚는 사람의 손길에 따라 그 맛과 운명이 정해진다.

제일양조장 권오학대표
제일양조장 권오학대표

제일양조장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으니 건물의 형태가 일본식 양조장과 유사하다. 낡고 오래됐지만 세월의 영광과 아픔이 오롯이 남아있다. 산업화와 표준화, 그리고 서양의 술에 밀려 우리 술이 절멸 위기에 처해 있다. 잊혀져가고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 골목은 낮고 느리다. 오래된 것들은 다 그렇다. 일제 강점기의 건물과 근대의 아픈 시절의 그것들이 촘촘히 도열해 있다. 악동들이 드나들던 만화방, 청년들의 놀이터였던 당구장과 체육관도 시들해졌다. 나직한 돌담과 흙담, 바람 일렁이는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량함을 이야기 한다. 속절없다. 하나씩 헐리고 그 자리에 국적불명의 새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아픔의 역사가 새로운 관광자원이 되는 시대다. 내 눈에 보기 싫다고 눈 돌리지 말고, 당장의 욕망 때문에 새 것만 쫓지 말자. 낡고 허름한 이 골목길에 맴도는 삶의 향기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괴산읍내 제일양조장 풍경
괴산읍내 제일양조장 풍경

 

골목길을 한 바퀴 돌아 나와서 재래시장을 다시 들렀다. <1박2일> 방송 프로그램에서 전국의 5대 시장 중 하나로 주목받았던 곳이다. 봄날의 가뭄과 여름날의 태양을 딛고 농부들의 진한 땀방울로 거둔 곡식이 가득하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푸른 계곡의 맛이 깃들어 있는 슴슴한 올갱이국 한 사발 청해야겠다.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사진작가,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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