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중원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중원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중원대 교수

 

지금은 종영된 문화방송 ‘전원일기’ 속, 삶의 풍경에 눈물을 글썽였다. 농촌드라마를 보며 울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한 가족들의 비아냥은 덤이다. 세상의 모든 미천한 자식들을 부끄럽게 하는 한국방송의 ‘인간극장‘ 속 효심 앞에서도 눈물샘은 터졌다.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8월 더위가 계속되던 어느 날은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훔쳐 내기 바빴다. 휠체어에 탄 북의 오빠와 남의 누이가 만나는 순간부터 눈물은 여지없이 시작되었다. 남의 동생이 눈물을 흘리며 "살아줘서 고마워.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장면에서는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치 챘겠지만 나는 눈물 많은 남자다.

눈물의 시대를 선도했던 대중소설의 르네상스 18세기는 내면의 진정을 토로하는 도구로서 이른바 눈물의 전성기였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서정적 글이 드물어진 21세기를 살며 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시대역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주변의 지인들은 이런 나를 두고 ‘사내가 그리 눈물이 많아서 어디에 쓰냐’는 측은지심 혹은 철없는 감성이라는 에두른 표현으로 날 평하기 일쑤다. 눈물의 감성에 냉정하게 태클을 거는 모진 언어들이다.

눈물에 대한 자기 옹호를 하자면 의학적으로 눈물에는 눈을 보호하는 면역물질이 들어있다. 근간의 연구보고는 눈물의 성분 가운데 락토페린을 암 치료제로, 라이소자임과 리보뉴클레아제를 에이즈 치료제로 개발 중이다. 이렇듯 눈물, 의외로 쓸모 있다. 눈물샘에서 나오는 눈물은 눈 밖으로 그대로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눈물의 하수도인 코를 통해 빠져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눈물이 날 땐 콧물도 필히 나오기 마련이다. 예외는 없다. 그러나 드라마 여주인공이 울 때는 콧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설정된 눈물은 콧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제대로 울어 본 자만이 아는 통찰력이다.

눈물이 강력한 감염력으로 보편적 현상이 되고 집단적 동질감을 확인하는 표징이 된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다.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후 파리의 민중은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오늘의 나의 눈물은 사회성 부족한 약자의 눈물로 평가 절하되기 십상이다. 감성적인 사람을 약한 사람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감성적 사람’이라는 평가는 곧 ‘약점’이 된다. 그러나 감동과 슬픔을 들키지 않게 어설픈 미소로 가리려 할 때마다, 내 마음의 생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영혼의 분비물인 눈물이 결점이 아닌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될 때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나이 쉰이 넘어서였다. 일상의 감정 선의 표현인 눈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내 안의 자아가 편해지기 시작한다. 내 감성이 나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더 깊고 섬세하게 바라보게 해준다는 사실을 닳아지고 수척해지는 중년의 나이테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아, 유레카였다.

때론 감성적 눈물이 ‘삶을 관조하는 힘’이 되어 이성적 판단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눈물이 나 자신을 권태와 삭막함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주는 ‘내면의 폭포’였다는 것을 말이다. 눈물을 ‘나의 진정한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이제는 내 눈물이 세상사에 치여 날로 무너지는 영혼을 지탱해주는 억센 힘줄 같았다.

눈물은 양면성이 있다. 세상에 굴복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생존의 산물이며 능동적인 공감의 측면도 있다. 타인의 온갖 감정에 걸핏하면 공감하는 것도 과한 것은 아니다. 우린 이미 안구건조증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울 수 있다는 것이 그 얼마나 인간답고 향기로운 것인가.

사랑하는 아들 멤논을 잃은 이후,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흘리는 눈물은 아침 이슬이 되어서 지상의 모든 것을 적신다. 숱한 자식을 잃은 세월호의 슬픔과 이념으로 분열된 나라에 살며, 드라마와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에오스를 위로하는 존재다. 사람에 대한 촉촉한 향기가 눈물의 레시피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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