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때아닌 만년필 논쟁이 또다시 국민들을 피곤하게 했다.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평양공동선언서에 서명할 당시 사용한 펜을 두고서다.

일부 언론에서 김정은은 고급 만년필로 서명을 한 반면, 문 대통령은 문구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네임펜'으로 서명을 해 의전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 즉시 청와대의 설명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평소에도 만년필을 잘 사용하지 않으며 서명할 일이 있으면 '네임펜'을 즐겨 쓴다는 반박이었다.

되지 않는 ‘국격 논쟁’을 부추기는 언론보도에 국민들은 지쳐간다.

여기서 말하는 국격이란 비싸고 고급진 명품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뭘 알고 하는 소리인가.

국내에서는 만년필을 아예 생산하지 않는다. 외국산과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 언론의 보도는 문 대통령더러 외국산 만년필을 사서 쓰라는 얘기밖에 안된다.

만약 그 잘난 국격 따지느라 한자루에 수십만원 혹은 수백만원 호가하는 외제 만년필을 썼다고 가정해 보자. 대통령이 국내 중소기업 다 죽는 판국에 외국산 명품 만년필이나 쓰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물어뜯고 난리쳤을게 뻔하다.

해를 거슬러 올라가 단군 이래 최대 환란으로 기억되는 1997년 11월 21일을 되돌아 보자.

임창열 당시 부총리는 프랑스제 몽블랑 만년필로 IMF 구제금융신청서에 서명했다. 국가부도 사태에 그의 ‘외제 만년필’ 서명은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됐다.

세월이 흘러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3년 9개월만에 ‘IMF 졸업장’에 서명하던 2001년 8월 23일. 그날 전 총재가 사용한 펜은 국산 아피스 만년필이었다.

경제주권을 되찾는 순간에 외제 만년필로 서명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에 직원들이 이미 생산 중단한 만년필 제조업체를 찾아 특별히 따로 만들어 온 것이다. 그 만년필은 지금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게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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