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동양일보) 여름 더위를 모질게 이겨낸 가을의 초입에 어감까지 무거운 ‘개량주의’를 꺼내든 의도가 있다. 나아질 게 없는 고용상황이 이 가을을 건너 겨울 한파로 들어 닥칠 거라는 근심 때문이다.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시도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결함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개량주의가 작금의 고용 난맥상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덤이다. 개량주의는 사상적 원칙론 자임을 자임하는 이들이 유연한 노선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경우에 전가의 보도처럼 차용된다. 정통과 대치되는 수정주의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차용하는 이의 속내는 불경하다. 자본주의의 결함, 특히 노동자의 고용과 빈곤의 구제를 지향하지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보수와 진보로 편 가르기가 극심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쩌면 세상일에 유연한 이들도 보수와 진보 간의 진영 틈새에 끼어 쉬이 내색하기 어려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우리 사회 개량주의자는 다수로 존재할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는 자영업자들의 절규와 작금의 고용 악화는 자영업 과실을 정작 자영업자들이 차지하지 못하는 분배 구조와 최저임금의 그늘을 보여주는 현상일 수 있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한 사회에서 표출되는 과격한 목소리들의 배후에는 대개 과격한 고통이 있다.

청년들이 헬 조선을 운운하며 기성세대가 늘 못마땅한 이유는 완전함을 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한 선과 완전한 정의가 어디 있겠는가. 지극히 사소한 불순물도 악으로 치부하는 보수와 진보 간, 서로의 공격들이 더 문제가 아니겠는가.



세상은 단일하지 않다. 선인 줄 알았던 것의 이면을 보고 악인 줄 알았던 것의 가여움이 어디 정치뿐이랴. 최저임금 인상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면 설사 그 표현에 어떤 허물이 있어도 공감의 마음이 앞서겠지만, 고통의 공감이 배제되면, 스스로 정의롭고 합리적이라 믿는 사람일수록, 저 ‘지나친 절규’가 최저임금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오류이며 반대론자들의 떼쓰기라는 생각이 앞설 뿐이다. 이념지상주의와 관료주의가 득세하는 사회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누구나가 경험의 기준치를 뛰어넘기는 어렵다. 무릇 정치인이라면 관료라면 그런 내 한계에 부끄러워해야지, 정책의 진정성을 몰라준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제정책은 서민 체감이 우선이다. 최저임금, 대의는 맞으나 현실은 무겁다.



집단에 관한 고민으로 80년대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인 주장에는 잘 끌리지 않는 개량주의자였다.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배우라”라는 선배들의 조언에 이끌려서이기도 하지만 태생적으로 과격함의 용기는 애당초 없는 주변머리였기에 그럴 것이다. 우리처럼 극단적 사회에서 개량주의는 진영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흑백논리에 치우진 이들과 관계의 상실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어차피 진정성만 있다면 모든 관계는 재생된다. 그 진정성의 내면은 이익에 휩쓸리는 좌충우돌이 아닌 합리적 소신이다. 진영논리에 굳이 천착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역사는 조화를 통해 구축돼 왔기에.



명분과 획일성을 선호하는 한국 사회에서 개량주의는 변절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 항간의 최저임금 문제는 의도의 순수함으로 밀어붙이다간 종국에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미 그 조짐이 보이고 있다.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정치가인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시즘 수정주의자로 이름이 높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지성과 사상적 포용력을 요청했다.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를 받아들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건재하다. 독일의 고용은 여전히 양호하다.



여당 대표조차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기여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구하는 문제를 진영 밖 이들과 함께 해결하는 것이 개량주의이다. 지분이 필요하다면 보수 야당에게 자신들의 지지층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명분과 실리를 챙겨주는 것도 합리적 선택이다. 정치적 야합 아니냐고? 천만에, 민생을 위한 현명한 선택이다.



지난 더위도 민생의 현상도 낡은 것은 극복된 것이지만 이 가을에 최저임금 인상, 그 불변의 논리 너머, 실체적 고통이 자영업의 현실 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개량적으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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