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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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최근 한국경제연구원이 전국 4년제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학생 5명 중 1명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8월 청년실업률이 10%로 1999년 이후 19년 만에 최악의 수준이라고 하니, 그나마 직장이 안정되고 퇴직 후 연금 혜택을 볼 수 있는 공무원을 선호하는 대학생들을 탓할 수만도 없겠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과거에 공무원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연상하고 했던가? ‘고지식’, ‘철밥통’, ‘복지부동’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 있음은 틀림없다. 이런 나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이 되겠다는 대학생이 그렇게 많은 상황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연 그 말들은 부정적 의미로만 해석해야 할까?

먼저, 공무원은 왜 그처럼 고지식하게 여겨지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에두를 것 없이 한마디로 얘기하면 규정 때문이다.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분명하고도 단호한 규칙이 있다는 말이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공무원은 국민 모두를 위하여 봉사하는 존재이다.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개별적이거나 개인적인, 혹은 사심에서 비롯한 의도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공무원이 자신의 역할 범위를 넘어서거나 규칙을 무시한다면 특정한 소수의 입장이나 요구가 반영된 결정과 집행이 이루어져 정책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니 규정이나 규칙에 얽매어 있다는 비난은 거꾸로 보면 기존에 충실하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말해 고지식하다는 것이 어찌 보면 공무원에게는 기본에 충실하다는 표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규칙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오랜 기간에 걸쳐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여 토의하고 수정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약속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규칙을 충실히 지킨다는 것은 공무 집행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의사결정의 신뢰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무리하게 성과를 얻어낼 요량으로 공동체의 절대 다수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 조치인 것이다. 공무에서 과감함 보다는 신중함이 우선시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공무원의 고지식함을 무턱대고 터부시 할 일은 아니다. 공무원이 느리고, 융통성이 없으며, 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히 그래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무원의 고지식함’이 행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고 권리관계의 안전성을 가져다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규칙에 집착하여 실제 내용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규칙에 얽매여 껍데기만 보고, 정작 중요한 정책의 본질을 보지 못할 때 ‘공무원의 고지식함’은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민원업무와 관련하여 ‘사정은 이해하는데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혹시 들어 본적이 있는가? 불합리한 정책임을 인정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집행해야 하는 규정은 집행 안 하는 게 차라리 낫다.

만약 규칙이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중립적이라고 한다면 규칙을 충실히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런 규칙은 없다는 것이다. 공무와 관련된 규칙은 그야말로 특정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고, 특정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되는 상황이 항상 발생한다. 더구나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우리의 삶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이 때는 그러한 규칙의 존재 이유, 즉 규칙의 목적을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 애당초 ‘왜 그런 규칙을 정해놓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은 자칫 규칙을 위한 규칙에 매몰되어 정책 본연의 목적과 거리가 먼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반문해야 한다. 규칙이 필요한 궁극적 이유와 까닭을 끊임없이 돌이켜 보노라면 규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을 조율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소신을 갖고 공무에 임한다면 ‘고지식한 철밥통’이 될지언정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둘을 가르는 미덕이 어떤 식으로 현실에서 구현되어야 하는지는 모든 공무원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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