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가을입니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에서 단내가 느껴집니다. 둘러보는 곳마다 편안한 풍요로움이 느껴집니다. 지난여름 전쟁과도 같았던 무더위를 생각하면 자연의 섭리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선선해진 바람결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가을은 딱히 주제가 없어도 무엇엔가 말을 걸고 싶은 계절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천지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을의 소리가 좋아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싶은 때입니다.

툭툭 도토리 구르는 소리, 마른 낙엽을 밟고 몸을 숨기는 청설모의 발자국소리, 후두두 산밤 떨어지는 소리,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게 없습니다.

엊그제는 남쪽 바다를 보고 왔습니다. 목포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달도(外達島)라는 곳인데, 마치 엄마 품에 안긴 늦둥이처럼 편안해 보이는 작은 섬 동네입니다. 섬을 빙 돌아 오솔길과 해변이 이어져 있고, 앙증맞은 등대도 보입니다. 하늘색 화선지 위에 새털구름이 한 폭의 수묵담채처럼 곱게 번지는 사랑스러운 이 작은 섬에도 무화과나무마다 가을이 익고 있었습니다.

#가을입니다. 제철이 돌아온 듯합니다. 10월 들어 우편함에서 꺼내온 청첩장이 둘, 메시지로 알려온 예식이 셋,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혼사도 하나 있습니다.

그 중에 주례를 부탁받은 결혼식도 있습니다. 근 15년 만에 주례를 서는 듯싶은데요, “다음은 존경하는 주례 선생님으로부터 결혼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을 귀중한 말씀을 듣는 순서가 되겠습니다.” 글쎄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과연 신랑신부가 주례로부터 듣고 싶은 ‘귀중한 말씀’이 있기나 한지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하긴 주례 없는 결혼식도 늘어나는 추세인지라, 주례사는 그저 식순에 들어있는 요식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경건해야 할 혼인예식이 보는 이 없는 팬터마임(pantomime)이나 들리지 않는 립싱크처럼 시끌시끌한 소음 속에 치러지는 예식문화는 사라졌으면 합니다.

#가을입니다. 결실의 풍요로움과 상실의 허전함이 공존하는 계절입니다.

곱게 물드는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의 쓸쓸함 사이에 잠깐, 꿈결처럼 다가오는 ‘푸르른 날’이 있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저기저기 저 가을 끝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 중에서)

물론 계절에 관계없이 세상은 매양 소란스럽고 어지럽게 흘러가지만, 이 좋은 계절, 자연이 허락해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단 며칠만이라도 가을이 보여주는 변화와 가을이 들려주는 소리에 자신을 맡겨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가을은 분주한 즐거움으로 꽉 차 있는 계절입니다. 지역축제의 대부분이 9월~10월에 걸쳐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지요.

가을을 가을답게 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명구(名句)입니다.

따뜻한 햇살바라기나 저녁놀 고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야말로 ‘앉아서 하는 여행’일 것입니다. 곱게 물든 산을 오르든, 황금빛 들녘을 걷든, 기차를 타고 가든 버스로 가든, 바닷가도 좋고 강변이면 어떠리, 온 천지가 축제의 물결인 가을 풍경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일이야 말로 ‘서서 하는 독서’로 충분할 것입니다.

가을입니다.

톨스토이가 들려주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도 함께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당신 곁에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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