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 침례신학대 교수

더위가 가시고 날이 서늘해지니 청첩들이 온다. 청춘들이 만나 연애하고 결혼에 이르는 이야기는 참 간지럽게도 반갑고, 잘 살아내기 바라는 마음에 더해 둘이 앞으로 겪게 될 삶의 고비들에 대해 내심 안쓰럽기도 하다. 둘 사이가 더 성장하고 성숙이야 한다지만 살아보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될 수록 그 행위와 생각들에 자신이 얼마의 비중인가를 헤아리기 때문일지 유독 용서를 아끼고 이해를 멈추는 모순의 심사에 빠지게 된다. 참으로 치사스럽도록 미묘한 마음자리들을 직면하고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는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된다.

동화처럼 사는 건 어떨까, 인생이, 남녀가. 오래 전승되어온 혼인의 이야기들은 끝을 맺을 때 꼭 “그 후로 둘이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붙였다. 그 말이 한 이야기의 단위를 맺는 지표가 되었다고 할까. 이럭저럭해서 선남선녀가 혼사를 치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뒤에 이 말이 붙으면서 환상적인 남녀의 사랑이야기나 동화는 끝이 난다. 그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리라는 추정, 희망, 축복은 간절히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니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고 당연한데 그 이상한 일이 우리 사는 일에는 일어난다, 신비하게도.

연애가 결혼이야기에서 끝나는 이유는 물어 무삼할까. 그 뒤부터는 책임과 의무가 부과되는 성인의 세계가 되며, 게다가 인간은 변하는 존재이고, 인생은 변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므로 사랑의 이야기도 바뀌기 때문이며 감성의 이야기가 관계의 이야기로 차원 이동하게 된다는 그 당연지사. 영원을 들먹일 정도로 사랑을 맹약했어도 어느 날 자기와 다르다고 소리를 질러대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둘이 사는 일이 죽을 만치 힘들다고 비명 지르는 순간이 오는 그런 일들. 딱히 헤어질 결심까지 아니어도 섣불리 갈라설 일을 입에 올리고 서로 가슴 철렁거리는 일들, 아이 기르는 일을 함께 사는 핑계로 삼는 것 같은 어느 때 마침내 부모처럼은 살기 싫다는 결론을 불쑥 꺼내들기도 하는 것이다. 화가 천경자 선생도 젊어 낸 수필집에서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벼른 일을 적고 있다. 모든 세대는 앞선 세대를 계승하면서 반발하는 법이고, 그렇더라도 자식 세대마다 얼마쯤은 같은 경로를 밟게 될 것이고 보면.

왕자와 공주는 결혼 뒤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게 될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오래 함께 살지만 행복하지는 않을 수도, 행복하지만 오래오래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대대로 먹고 살 재산이 있고, 대대로 걱정없는 고귀한 신분이 보장된대도 너무도 풍족해서 외려 무의미와 무기력해 질 수도 있을 터이다. 좋은 조건을 행복 지속 근거로 일반화할 수 없는 셈이다.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는 고귀한 신분의 아름다운 공주가 멋진 왕자 둘 사이 갈등없는 광물질같은 굳건한 사랑을 제시한다. 그 사랑은 나의 못남과 그의 잘남을 참고, 그의 미숙과 나의 성숙을 견디는 책임의 측면은 없는 환상의 세계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담과 혼사담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결혼 뒤의 추레한 일상들은 아예 빼먹어 버리는 지도 모른다. 동화가 끝난 다음 이야기는 소설적이다.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는 존중의 이야기로 바뀌어가는 처절하지만 진실한 이야기들로. 공주는 오롯이 그 과정을 견뎌야 하고, 왕자는 책임의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는 진짜 어른이 되는 이야기, 마법같은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의 힘을 길러가는 노력, 사랑은 사람 사이에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쌓아가야 하는 관계의 더께같은 것임을 서서히 익혀가는 새로운 이야기의 전환을 견뎌가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 뒤에 오래오래 진짜로 행복하자고.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 존중이 더 중요한 시기가 온다는 그런. 사랑은 어떻게 외양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신기한 간지럽고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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