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호 논설위원 / 수필가

2018년 7월 23일 최인훈 선생이 서거했다는 보도는 하필 같은 날 아주 깨끗한 양심적이란 수식어로 칭송받던 노회찬 국회의원이 4000만원이란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바람에 떠들썩하여 문학인은 그냥 ‘광장’의 작가란 짤막한 소개만으로 그쳤다. 작가의 문학과 삶에 대한 회상이 신문마다 나타나긴 했지만.

험하고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 노회찬 의원은 어찌 보면 산소 같은 신선한 감성을 국민에게 주었다. 유별난 지성, 친서민, 친인문적인 언행이 돋보였으나 가난한 정당의 가난한 정치인은 버티기 힘들었던가 싶어 안타까운 심정들이 땡볕에 긴 줄을 서며 모여 그를 기리고 있었다.

문학과 정치, 두 분야의 유명 인물이 죽고 얼마 지나고 나니 과연 누가 더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오래 기억되는 인물이 될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하게 된다.

최인훈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할 때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으나 그 분의 귀중한 원고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던 때문이다.

<포석 조명희 전집>을 동양일보에서 1994년, 포석 탄신 100주년을 맞아 발간하면서 그때 마침 최인훈 선생 필생의 역작 <화두>1,2권 장편소설이 20년의 침묵을 깨고 나왔는데 첫 면부터 우리를 감동시켰다. 포석의 ‘낙동강’의 첫머리가 그대로 거기에 살아있던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이 W시(원산시), 아마 원산고등학교 교실에서 포석 조명희의 ‘낙동강’을 교과서에서 공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의 인연이 작가의 평생 ‘화두’로 따라다니며 스승의 역할을 한다. 소련에서 여행하면서도 옆자리에 포석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포석 조명희가 내 곁에 딱 달라붙어서 나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여객기가 중·소 국경의 어디쯤 아마 하바로브스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상공으로 들어서는 순간 포석의 영혼이 훌쩍 솟아올라 내 곁에 와 앉았다는 환각이 슬며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옆에 앉은 포석이 말했다. ‘내리세, 여보게.’”

“스스로가 노예의 땅에 태어났다가 거기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지자 이 나라의 구체제가 세계에 선포한 대의를 믿고 이 나라에 망명했던 포석 조명희. 그리고 그 대의의 이름으로 총살된 시인 조명희. 아마도 망명의 10년 동안 이 도시 레닌그라드에 와보지도 못하고, 건너온 자기 땅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나라의 변방 도시의 지하실에서 온갖 해명에도 불구하고 총살된 선배 작가 조명희.”

소련에서 포석의 문건을 챙긴다. 그곳 작가들과도 교유한다. 미국 방문에서도 세계 여러 나라 작가들과 토론하고 그네들 집에도 들르며 견문을 넓힌다. 북한과 남한에도 정주하지 못하는 작가. 그는 세계의 이데올로기, 철학, 역사, 인생의 깊이를 확인한다.

그의 ‘화두’는 ‘낙동강’의 서두를 다시 인용하면서 끝난다. 곧 이어 다음 세대에게 ‘낙동강’의 연속성을 물려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포석 전집을 발간하면서 최인훈 선생께 ‘화두’를 잘 보았다면서 ‘포석 선생께 드리는 헌사’를 써 주십사고 전화로 부탁드렸더니 어디서 발간하느냐, 해설은 누가 쓰느냐, 여러 궁금증을 물으며 까다롭게 질문을 하시더니 ‘헌사’라기보다 포석의 생애에 관한 글을 흔쾌히 언제까지 보내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원고 독촉 전화도 드리면 한여름 더위에 건강이 좋지 않다면서 소화기계에 이상이 있다면서도 글을 보내주셨다. ‘문학사에 대한 질문이 된 생애’란 아름다운 문장의 글은 포석 작품을 볼 때마다 되보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조명희 선집> 복사본도 보내달라고 하여 보내드렸다. 한 번 뵙고 말씀도 나눈다면서도 그후 잊다시피 있었다.

몸이 달을 때만 부탁하고 독촉하다가 가신 후에야 뒤늦게 후회한다.

조병화 시인은 자신의 문학관을 죽기 전에 지어서 전시를 하고 있었다. 미리 조촐한 기념관을 마련했다. 그곳에는 ‘고향은 인물을 낳고 인물은 고향을 빛낸다’는 편액을 걸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안성시는 근래 새로 멋지게 아마 많은 돈을 들여 조병화문학관을 만들어 인물을 더욱 키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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