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맑은 날엔 단풍이, 흐린 날엔 낙엽이 먼저 떠오르는 계절입니다.

가을의 한 복판, 10월에 느끼는 센티멘털리즘인지 몰라도 단풍들고 낙엽 지는 계절엔 자연히 살아온 날들과 남겨 진 세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사람이 죽고 난 후에 벌어 질 사후세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가 ‘영혼의 무게’로 까지 이야기가 확산되었습니다.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얘긴데요, ‘영혼의 무게 21그램’은 실제로 1907년 미국 매사추세츠병원 던컨 맥두걸의사가 임종직전의 결핵환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를 논문에서 밝힌 수치입니다.

2007년, 스웨덴의 룬데 박사팀의 이 맥두걸의 실험을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검증했는데 놀랍게도 임종 시 일어나는 체중변동이 정확히 21.26214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다한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면 영혼의 무게만큼 가벼워 질것이라는 야릇한 전제가 성립된 셈이지만, 학계에서는 여전히 21g의 질량변화가 곧 영혼의 실재라는 등식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직관이 강하기로 유명한 고대 이집트인도 사람이 죽으면 정의와 지혜의 여신이 ‘라의 천칭’이라는 수평저울로 한 사람의 생애, 즉 심장(영혼)의 무게를 잰 다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스위스 로잔 공과대의 올라프 블랑케(Olaf Blanke)교수는 유령(영혼)실험을 통하여 ‘유령의 존재란 결국 뇌 감각 신호간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무게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심층적 노력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21그램에 불과한 영혼의 무게와 한 생을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의 무게를 견주어보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몸무게의 몇 십분의 일밖에 안 되는 이 가벼운 영혼에게 전 생애를 휘둘려야 하는 유한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일까요.

그도 아니라면 영혼의 존재마저 파헤치고 까발려 사후세계에까지 개입하고 싶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함의 발로일까요.

한 세기도 꽉 채우지 못하는 인생인데 고작 21g의 영혼을 위해 살았다는 허탈함과 죽음 이후 맞게 되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또 하나, 이 가을에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갈리리 호수’가 있습니다. 둘레가 52킬로미터에 이르고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4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담수호로 바다인지 호수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넓은 호수입니다. 그보다 몇 배나 더 넓은 ‘사해(死海)’가 이스라엘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두 호수를 연결해주는 물줄기가 요르단 강입니다. 시리아에서 남쪽으로 흘러 이스라엘을 지나 요르단에 이르는 강입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는 찬송가에 나오는 바로 그 강입니다.

이 두 개의 호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켜야하는 삶의 방정식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나눔’과 ‘탐욕’에 대한 얘기입니다. ‘소통’과 ‘불통’의 결과로 빚어지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생명’과 ‘죽음’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여기저기서 받아들인 풍부한 물을 다시 필요로 하는 곳으로 보내주기 때문에 늘 생명력이 넘치는 ‘생명의 호수‘로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주 무대도 바로 이 갈릴래아 호숫가 입니다.

반면, ’사해(死海)‘는 받아들이기만 하고 어느 곳으로도 물을 내보내지 않아 생명력을 잃고 있습니다. 물이 흘러 들어오는 만큼 같은 양의 수분이 날아가 버려 바닷물의 다섯 배까지 염도(鹽度)가 높아져 생명체가 살수 없는 ’죽음의 바다- Dead Sea‘가 된 것입니다.

비록 작은 나뭇잎이라 할지라도 햇빛과 바람과 소통하며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다가 스스로 낙엽이 되어 뿌리에게 마지막 온기를 내어주는 낙엽의 생애를 보며, 이 가을, 10월이 들려주는 따뜻한 사연의 속뜻을 되짚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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