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진 청주시내덕2동장

반동진 <청주시내덕2동장>

이제 나이 육십, 치열하게 살아왔고 열심히 가족을 부양한 베이비 붐 세대다. 밥을 천천히 먹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고 일을 놓고 쉼도 사치로 느끼는 세대. 그렇게 달려온 세월이 나를 밀쳐내 퇴직을 앞두고 있다.

무료한 주말, 무언가 하지 않으면 조급증이 생기는 우리 세대의 공통 병을 치유하고 오랜만에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갖고자 청주의 유명한 사적지인 상당산성을 찾았다.역시 그놈의 조급증은 상당산성까지 무언가에 쫓기듯 숨을 헐떡거리며 날 밀어 올렸고 정상에서야 걸음을 멈추게 했다. 관성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남보다 빨리 완전하게 일해야 인정받는 사회의 냉혹함이 그나마 갖고 있는 취미도 그렇게 만들었나보다. 이런 자조감이 나의 발걸음을 잡았고 천천히 주변을 살피는 여유를 갖는다. 동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길이 보였다. 전에 청주와 낭성을 잇는 유일한 도로였지만 새로운 길이 뚫려 몇 년 전부터 옛길로 복원된 길이다. 익히 들어서 아는 길이지만 이렇게 막상 그 길 위에 서보니 무척 사랑스럽다.가을의 따스한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볼 빨간 나뭇잎들이 고갯마루에 걸터앉은 나를 반겨준다. 몸을 일으켜 이 사랑스러운 옛길을 걸어본다.

일부 길에는 전에 차도였음을 말해주듯이 아스팔트 위의 노란 중앙선이 흐릿하게 보이고 곳곳에 자연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을 듯한 곤충 조형물도 보인다.

아무렴 어떠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계절 아닌가! 오히려 그냥 그대로 남겨둔 것이 더 정 있어 보인다. 어디에서 낡아지고 퇴락해가는 차 없는 아스팔트길을 걸어 보겠는가!갖가지 꽃들도 보이고 키 작은 화목류와 습지식물도 보이고 좀처럼 보기 힘든 이끼 낀 고목과 주변을 흐르는 물소리가 아주 정겹다.

급한 오르막 고개 위에 자리한 정자는 오름에 지치고, 팍팍한 인생에 지친 사람들을 향해 넓은 가슴을 넉넉하게 내어주고도 모자라 시원한 골바람도 덤으로 선사한다.

길옆에 돌과 나무로 만든 쉼터에는 아름다운 상당산의 풍광을 조망하는 너른 터가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셀카 유혹을 안기고, 가족과 같이 온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놀이터가 돼준다.

그곳에는 굽이굽이 길마다 서 있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해바라기도 볼 수 있다. 예전에 굽은 도로에 설치된 동그란 반사경을 해바라기 꽃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누군지 참 신선한 아이디어다. 난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나무보다 기생식물인 덩굴식물이 먼저 단풍이 드는 것을 알았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석양은 수고한 내 발걸음에 대한 축복인 듯하다.

그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이 청주의 큰 장을 보려고 넘었고, 명절날 그 조상님들을 찾고자 넘던 상당산성 고갯길이 이제는 그 아래 세대 사람들이 가을을 느끼려고,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려고, 또한 건강을 위해 찾는 길이 됐다.

솔솔 부는 가을바람에 화답하듯 몸짓하는 단풍의 모습과 옛길 주변의 가을꽃들이 반기는 이 가을에 일독(一讀), 아니 산 걸음을 권한다.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청주 상당산성 옛길의 정취를 함께 나누고 싶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