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2회 노년철학 국제회의는 지난 9월11일∼13일 사흘 동안 충북 보은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에서 열렸다(주최 보은군, 주관 동양일보의 동양포럼). 주제는 ‘초고령사회의 노인상(像) 정립과 지방 발전에의 기여’이고, 부제는 ‘한·일간 노인상 대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회의는 동양포럼 주간인 김태창 선생(이하, 경칭 생략)의 주재로 ‘발제와 질의응답’ 그리고 ‘대화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방식은 그가199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간을 주관했던 교토포럼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이번 회의에 나는 처음 참가했다. 그러나 김태창 주간과의 인연은 길고, 친분은 두텁다. 교토포럼을 통해 마치 사제(師弟)와 같은 교제를 계속해왔던 까닭이다. 교토포럼은 ‘공공(公共) 철학’을 주된 의제로 삼았다. 이를 개신(開新)하여 ‘동아시아발(發) 공공철학’을 세우는 일이 목표였다. 회의는 거의 매달 열렸다.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참가하여 성실한 발제와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또 세계 곳곳으로 나아가 수많은 학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려움도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결실은 컸다. 요즘은 ‘공공철학과 함께 공공이란 용어가 상식처럼 퍼져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노년/ 노인철학’이라니 어떻게 세우려는 걸까? 이런 물음을 안고 참가했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물음은 사라졌다. 어떻게든 세워나가야 할 ‘필수불가결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영감(靈感)처럼 찾아든 것이다. 이미 세계는 고령화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고령화 문제가(환경, 인구, 식량등 문제와 더불어) 유령처럼 지구 곳곳을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노인, 세대, 젠더안 사이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앞으로는 더 심각하게 될 수 있다. 이는 노인복지 정책에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다. 그 정책은 물론 필요하다. 다만, 시야가 좁은 미봉책이 되면 곤란하다.

고령화 문제는 철학의 문제이자 과제이다. 인간관, 세계관, 문명관 등 관점/ 관념과 연관되고 결합된 까닭이다. 이들 관점/ 관념을 개신/ 개혁하면서 풀어야 할 문제/ 과제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이를 세우는 일은 모든 세대, 남녀 공통의 문제/ 과제이다. 그렇지만 특히 노년/ 노인의 경험, 지혜,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노년/ 노인철학’이며, 이를 ‘경험, 지혜, 깨달음의 철학’이라 불러도 좋다. 다만, 이때 ‘노인’이란‘ 모든 사람’을 표상한다. 사람은 늙어간다. 그래서 언제든 노인일 수 있다. 또는 젊은이든 어린이든 천부천명(天賦天命)의 능력과 소질을 발휘한다면 ‘노련한 노장(老壯)’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누구든 노인 범주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날 오전의 ‘취지설명’에서 김태창은 이렇게 말했다: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의식개혁이 필요하다. 노인은 결코 복지대상만이 아니다. 많은 노인은 물질적, 정신적 여유, 기력을 보유하고 있다. 오히려 도움, 베풂, 갚음의 주체이다. 국가와 사회에 보답하고 환원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뜻에서 노인철학은‘ 보은(報恩)의 철학’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세대 특히 노인세대는 각성하라! 그리고 생각(生覺)하는 사람이어라!

첫 발제로는 사정상 참가하지 못한 데구치 야스오(出口康夫, 교토대학 교수)의 발제문을 다루었다. 제목은‘ 노년기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1900-1990)의 삶과 사상’이다. 니시타니는 이른바 교토학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의 ‘근대의 초극(超克)’론에 가담했다가 전후(戰後)에 공직 추방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만년에 지은 ‘한산시(寒山詩)’에 나타난 공(空)과 늙음’을 데구치는 독특하게 풀고 있다.

나는 그의 ‘공철학’이든 ‘늙음’이든 이해하기 힘들었다.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요카이치[四日市]대학 명예교수) 역시 그랬던지, 니시타니의 공이란 불교본래의 공을 왜곡시킨 것이라며 비판했다. 속죄 없는 현실도피와 책임회피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궤변과 니힐리즘을 담고 있다고 본다. ‘늙음은 삶도 죽음도 아닌 제3의 범주’라느니, ‘죽음을 산다. 지속적이고 체험 가능한 죽음’이라느니, ‘타자의 늙음을 늙는다’라는 것이 올바른 말일까. 궤변이요, 니힐리즘이다. 불교의 공 또는 도교의 허를 득도(得道)한 자 아니라면 함부로 논하지 말라! 자칫하면 논리비약으로 궤변을, 잘못하면 현세초월에서 현실도피나 니힐리즘을 이끌 우려가 있는 까닭이다.

기타지마는 이번 회의에서 처음 뵌 분이다. 틈틈이 대화를 나눠보니 그는 일본의 문제점을 거리낌없이 ‘자기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다. ‘타자 배우기’의 본뜻을 체득한 사람이다. 양식(良識)적 일본인인 셈이다. 그런데 ‘자기비판’에 약한, 무관심한 일본인이 예부터 기금껏 실로 많다. 비판을 위한 ‘보편 공공의 가치 판단의 기준’이 약하거나 없는 탓이다. 그런 도리를 모르는 무도한 일본인. 정략, 이익추구를 제외한 ‘타자 배우기’를 못하거나 싫어하는 일본인이 많은 탓이다. 이번에 참가한 일본학자는 기타지마와 거의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 이런 일본인들에게 손 내밀고 힘주는 한국인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들이 앞으로 다수파가 되기를 기대한다.

두 번째 발제 역시 참석하지 못한 안유경(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원)의 ‘노년기 주자(朱子)의 삶과 사상’을 다루었다. 주자(1130-1200)는 60대 이후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의 학문은 위학(僞學)으로 금지되었다. 또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이런 역경을 그는 학문과 저술로 이겨냈다. 죽음의 순간까지 배움을 지속하면서 빈틈없는 삶을 마감했다. 특히『대학』의 편찬에 주력하여 수정을 거듭했다. 동시에 ‘격물치지(格物致知)’론을 새롭게 전개했다. 그리하여 ‘물(物)=사(事)의 리(理)=이치, 견문의 지와 덕성의 지,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 등의 탐구론, 지식론, 수양론. 그리고 ‘배움의 목적은 실천에 있다’는 이른바 지행병진(知行竝進)론을 수립했다. 이런 주자의 삶은 노인 모든 사람에게 거울이 되리라.

모든 학문에는 크든 작든 오해가 따른다. 그렇긴 하나 주자의 학문은 너무 오해되어 있다. ‘주자학 오해’는 특히 일본사상사의 오랜 전통이다. 게다가 근대이래 오해를 더하면서 지금껏 곳곳에 퍼져 있다. 일본뿐만 아니다. 한국에도 여타 나라에도 퍼져 있다. 특별히 한국인에게 고한다. ‘주자학은 옛한국(조선)의 덕(德; virtue, L: virtù)이자 힘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도리를 좇는 구도의 학, 도학이었다. 정신과 물질의 균형있는 행복과 풍요를 추구하는 실심실학(實心實學)이었다. 리학, 기학, 심학 삼위일체의 학문이었다.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가져다 주었다. 이를 모르면 배은(背恩), 망덕(亡德)이다. 모르든 알든 그 전통과 유산은 지금도 살아 있다. 잃어버리지 말라! 오늘날과 미래에 알맞추어 새롭게 계발해 나가라!’

‘망국의 한(恨)을 극복하라! 조선이 망한 탓을 주자학(과 전통)에게만 돌리지 말라! 과연 주자학 탓인가! 서양(근대) 학문 탓은 아닌가!’ 모든 학문은(어떤 인간/ 사물이든) 정(正)과 부(負) 양면을 지닌다. 주자학도 서양학문도 그렇다. 그런데 ‘왜 주자학의 부만 탓하려 드는가! 그 덕/ 힘마저 비틀어대는가!’ 하긴 덕/ 힘은 치명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도덕, 무지막지한 물리력 앞에 ‘때로는’ 약하고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때에 ‘덕/ 힘의 약함만 탓하고 무도덕, 무지막지의 문제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려는가! 그 강함만 좇아 남을 해치고,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 싶은가?’ 그러느니 해치지 않고, 차라리 망국을 선택하고 싶다.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다. 이게 바로 덕/ 힘이기에 덕/ 힘이 ‘결국은’ 강하고 이김이 진리인 까닭이다.

‘근대의 주박(呪縛, 홀리고 얽매임)’을 벗어나라! 어찌하여 주자학의 ‘리, 지, 행’에 담긴 의미심장한 뜻과 지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문제점만 보려 하는가 ‘주자학 오해’를 풀기는커녕 덮고 모른 척하는고! 타파하긴 커녕 답습하고 있는고! 왜 근대주의적 시각, 편견으로 자기 전통을 함부로 재단하려 하는가! 타자에게 혼을 파는 노예가 되려하는가! 서양철학의 들보 같은 문제/ 한계는 외면하는가! 반면 동양철학의 티눈 같은 그것만 파헤치려 하는가! ‘무지’와 ‘무지의 무지’에 빠져 있음을 깊은 성찰, 비판, 각성이 필요하다.

거듭 말해 노년/ 노인의 경험, 지혜, 깨달음이 필요하다. 이를 활용한 ‘노년/ 노인철학’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 골조 하나를 ‘새롭게 계발한’ 주자학으로 세우면 좋으리라. 김태창주간은 토론에서『천명도설(天命圖說)』에 기초한 견해를 피력했다. 춘/하/추/동의 네 계절을 순서대로 생(生)/장(長)/성(成)/장(藏)과 인/의/예/지에 대비시킨 것이다. 노년이 인생의 겨울이라면 거기에 ‘담그기, 감싸 안기’의 장과 ‘지혜, 깨달음’의 지(智)가 자연히 따른다. 당연히 따라야 한다. 바로 주자학의 가르침이 그렇다.

세 번째 발제자 김용환(충북대 교수)은 ‘노년기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삶과 사상’을 발표했다. 해월 최시형은 스승인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순도(殉道)한 뒤 동학을 부흥시켰다. 죽음을 무릅쓴 도피생활 속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만들고, 자신의 지혜, 깨달음, 그리고 개벽(開闢)의 꿈을 펼쳤다. 예컨대1880년(54세)에 <동경대전(東經大全)>,1884년에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했다. 여러 차례 스승의 신원(伸寃)운동을 전개했다. 1894년에는 새나라 건설을 목표로 동학혁명을 일으켰으나 예상치 못한 외세개입과 청·일전쟁을 유발했다. 그러자 ‘척왜양(斥倭洋) 창의(倡義)’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실패한 뒤1897년, 죽음을 예비하듯 제자 손병희(孫秉熙, 1861-1921)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마침내1898년, 72세때에 체포되어 순도했다.

해월의 구도, 가르침은 ‘바람직한 노인상과 노인철학’의 방향을 가리킨다. 그의 가르침은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집약된다. 모든 사람 특히 여성을, 아이를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뜻이다. 또한 한울님, 사람과 함께 세상만물(자연)을 공경하라는 뜻이다. 이른바 삼경(三敬) 사상이다. 거기엔 천·지·인 삼재(三才) 또는 ‘한울, 사람, 생태’의 삼원(三元)의 사고가 깔려 있다. 이는 한국의 오랜 전통에 뿌리박힌 철학. ‘한 철학’의 유산에 다름 아니다. 그 계승, 계발은 ‘노년/ 노인철학’의 과제가 되어 마땅하다.

토론시간에 기타지마는 동학의 ‘천’에 담긴 뜻을 풀었다. ‘나를 초월한 천과 내안의 천’이란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진여(眞如)와 불성(佛性)’에 대비시켰다. 이에 김용환은 수운의 천이 초월성이 강한 ‘외재천’이라면 해월의 천은 내재성이 강한’ 내재천’이라며 화답했다. 기타지마는 또한 신란(親鸞, 1173-1263)이 창시한 정토신종(浄土眞宗)과 동학과의 유사성을 보고자 했다. 그는 정토신종 계열의 승려이다.

그런 다음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개념을 둘러싼 토론이 벌어졌다. 그 상세는 생략하나, 거기서 지적된 사항 하나만 언급한다. 서양의 영성은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이원론, 이원 사고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동학의 천, 그 사상체계는 삼원론, 삼원 사고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를 설명할 시간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네번째 발제자 김양식(충북학연구소장)은 ‘노년기 성운(成運, 1497-1579)의 삶과 사상’을 발표했다. 성운은 서울 출생이나 49세이던 1545년부터 보은에서 여생을 보낸 재야지식인이었다. 그는 사림파의 정계진출이 일련의 사화(士禍)로 이어졌던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그 마지막인 을사사화(1545년) 때는 성운 역시 형의 죽음 등 피해를 입었다. 이에 성운은 귀촌(歸村)을 선택한 것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사화시대는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일반에서 각종 혁신과 변화가 병행하던 시기라는 점이다. 이런 시기에 사림파 중에는 정계를 멀리하고 학문, 수양에 힘쓰면서 정치비판, 공론정치, 향촌개혁 등에 참여하는 재야지식인이 훨씬 더 많았다. 성운은 그 한 사람이었다.

김양식에 따르면 성운은 ‘권력, 물욕을 탐하지 않는 자연인’으로 살아간 ‘산림처사’ 였다. 그리하여 ‘청빈낙도와 자연을 벗하면서 아름다운 노년기’를 보냈다. 동시에 책과 거문고, 시와 노래를 즐겼다. 이로써 ‘보은 지역의 학풍을 진작시켰다’고 한다. 그의 ‘사상과 철학이 함께한’ 귀촌생활이 지역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김양식은 노년기 성운의 삶은 ‘지역의 변화가 나라 발전을 이끈다’라는 지역학의 관점에서 현실과 문제점에 관한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졌으나 생략한다.

성운의 삶으로부터 바람직한 노인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노인의 미학을 엿볼 수도 있다. 그것을 김태창주간은 ‘물러남’과 ‘신독(愼獨)’의 미학이라고 표현했다. 이로써 첫날회의를 마감했다. 참가자 일행은 동양포럼의 유성종 운영위원장의 안내로 식당을 향했다. 거기서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의 멋진 자연을 벗하면서 친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회의중에 생긴 피로, 불만, 갈등을 풀어주었다. 둘째날, 셋째날의 만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째날 나는 사회를 맡았다. 회의는 대한노인회충북연합회 이응수 부회장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그는 보은군의 인구실태와 노인복지를 위한 각종 시책을 소개했다. 그런 다음 두 가지의 정책건의를 덧붙였다. 하나는 정년을65세에서70세로 올리고, 노인인력을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시책은 나아졌으나 노인문제를 담당하는 부서가 너무 많아서 효율성이 떨어지고 예산만 낭비하여 국가적 손실이 크니 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공감했다.

이어서 다섯 번째 발제자 이은선(세종대 명예교수)은 ‘노년, 여성, 영성에 대한 성찰’을 발표했다. 첫마디는 ‘학이성인(學以成人), 공부와 배움을 통해서 참된 어른이 되자’는 유교전통의 언급이었다. 유교는 참된 사람이 되려면 ‘학문 즉 묻고 배움’을 통한 ‘수기(修己)’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거기에 ‘학이치용(學以致用)’을 더하면 유교의 기본사상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이 될 것이다.

그런 유교 전통이 지금은 사라졌는지 한국사회에는 멋진 ‘남성’ 노인이 드물다고 여성들은 불만스럽게 말한다고 한다. ‘젖은 낙엽’처럼 추루한 노인의 모습. 왜 이렇게 됐는지를 진단한다. 예컨대 ‘노년이 되면 공부를 그만두고, 배움이란 젊은 시절의 것으로 여긴다. 이른바 근대지(近代知)의 영향으로 외적인 지식정보만 채운다. 전통학문이 가르치던 인격수양 즉 대인(大人)이나 성인(聖人)이 되는 일을 잊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자가 말한 ‘견문의 지와 덕성의 지’의 후자가 외면되면서 양자균형의 어른, 노인이 거의 사라진 것을 탓한 셈이다.

이런 비판의 화살은 근대, 근대화의 각종 적폐로 향한다. 예컨대 ‘외적성장과 부와 쾌락의 추구, 가족공동체와 공공영역의 훼손, 비인간화와 성애화(sexualization)’ 등이다. 그에 대한 처방은 이렇다. ‘지성뿐 아니라 인성 특히 영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여성의, 여성적’ 덕과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로써 ‘노년/ 노인철학’의 과제를 던져준 셈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여성의 시각에서 유교의 ‘도, 리, 천’을 ‘영성’으로 풀이한다는 점이다. 덧붙이면 첫째날 밤, 나는 그의 저서『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도서출판모시는 사람들, 2009)를 기증받았다. 곧바로 읽고난 감상은 ‘학문적 동지를 얻었다.’는 쾌재(快哉)였다.

토론시간에 필자는 여성참가자 모두에게 발언기회를 주기로 했다. 시인이자 학자인 김영미(대전대학교 강사)는 여성의 덕과 지혜를 다시 언급했다. 이를 받아 이은선은 ‘여성이 더욱 영성적’이라 주장했다. 그 취지는 ‘리와 기의 불이(不二)를 보고 살리는 능력이 영성이다. 이 능력은 구체적 삶, 실천에서 길러진다. 그런 감각, 감성은 생명의 근원에 더욱 가까운 여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몸은 세대(generation)를 생성하고 기르는 기반이다. 생성성(generativity)과 관대함(generosity)을, 인(仁)과 덕을 체현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그렇다’는 여성이 많아진다면 보다 나은 세상이 오리라! 다만, 여성은 여성만의 것은 아니다. ‘남성 속에 여성이, 여성 안에 남성이 있다.’

김태창 주간은 여성, 남성을 각각 생성성과 창조성(creativity)으로 대비시켰다. 생생지덕(生生之德)’을 상징하는 전자는 ‘세대, 산출, 타자 중심’ 등으로 연결된다. 나아가 ‘만남, 대화, 함께’의 상관연동(相關聯動)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이들 양자를 지양하는 것이 영성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쪽의 ‘생성정신(generatice spirt)’을 양쪽이 ‘함께하는 생성정신 (co-generatice spirt)’으로 화합하는 정신(靈, spirit)을 자아내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공공철학’이 지향하는 공공성(publicness or publicity)의 정신이기도 하다.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김영미는 ‘나이들수록 아름다운 두 여류시인’이란 글을 발표했다. 부제는 ‘김남조와 유안진의 문학과 인생’이다. 이로써 ‘노년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두 시인이 구현하고 있는 ‘상생의 모태 지향성’과 ‘생명 사상’의 문학을 소개한 것이다. 나는 한동안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두 시인이 지은 몇 편의 시를 읽고 나서 감격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시 한수가 논문 백편을 이긴다’라고,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때의 감성이 되살아났던 까닭이다. 나를 울린 몇 편의 시, 그런 시의 향기를 ‘노년/ 노인철학’은 어떻게 담아내고, 얼마나 자아낼 수 있을까?

덧붙이면 휴식시간에 김영미는 자신의 저서 <정지용시와 주체의식>(태학사, 2015)을 나에게 기증해 주었다. 정지용(鄭芝溶, 1920-1950)은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일제의 식민지시대,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한국전쟁 때에 북한군에게 구속된 뒤 행적은 아직 모른다. 그렇게나 불행한 시대를 살았는데, 그의 수많은 시에 담긴 ‘전통적인 향토의 정서, 자기와 타자를 위한 구도의 열망, 천주교를 통한 영성과 인류애의 추구’ 등은 너무도 향기로웠다.

여섯번째 발제자 기타지마는 ‘노년기 신란의 삶과 사상’을 발표했다. 노년기의 신란은 ‘정정취(正定聚)’라는 개념을 일관되게 강조했다고 한다. ‘신심(信心=신앙)을 얻으면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사라지고, 목숨이 다하면 부처가 된다. 바로 정해진 사람들, 즉 정토신앙에 귀의한 무리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정정취의 위계에 오르려면 염불(念佛)을 하면 된다. 그리하여 정정취가 된 사람을 신란은 ‘등정각(等正覺)의 위계에 오른 사람’이라고도 표현한다. 또한 이 위계에 오른 사람들 즉 제자들은 ‘평등한 동료가 된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신란과 그의 신도들은 막부(幕府)의 ‘염불탄압’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鎌倉)시대로서 전국 각지는 전란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또한 불교는 막부 탄압이나 종파간 대립을 겪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와 불안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은 마치 복음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래서 정정취의 무리, 공동체에 입신하여 ‘차별과 억압이 아닌 차이와 평등이 공존할 수 있는 기쁨’을 맛보고 싶어 했으리라. 그리고 ‘폭력없는 국가, 사회’가 되기를 빌었으리라. 아무튼 기타지마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노년기의 신란이 제기한 ‘정정취’론은 분석· 격차를 축으로 하는 오늘날의 고령화 사회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신란의 정토신종을 좋게만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여러 사람 특히 일본인에게 복음일지라도 그 안에 보이는 ‘폐쇄성, 특수성’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정취는 폐쇄된 집단이다. 실제로 무리는 이루었으나 그 안에 갇힌 채 당시 국가, 사회를 변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론 그렇게 만든 것은 가마쿠라 막번(幕藩)체제의 폐쇄성 탓이었다. 문제는 그 폐쇄성의 전통이 현대일본에도 곳곳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특히 문제는 ‘특수성’이다. 정토신종은 일본사회에 맞게 토착화된 불교의 하나이다. 그런데 거기서 ‘불교에 담긴 보편성을 특수화’하는 성향이 드러난다. 주의를 환기하자면 ‘보편의 특수화’는 일본사상사를 꿰뚫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토론시간에는 한동안 기타지마와 김용환의 대화가 벌어졌다. 주제는 신란과 해월의 삶, 정토신종과 동학 등의 비교였다. 이때 김용환은 ‘타자본위의 삶’이 해월과 신란의 공통점이라 했다. 그렇긴 하나 ‘타자본위’는 신란 등 일본승려가 말한 ‘타력본원(他力本願)’과는 다르다고 본다. ‘타자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에 의한 구제’를 바라는 것이 ‘타자본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일불교의 염불과 그 차이를 논의하기도 했다. 일본불교의 계파에 관한 문답도 있었다.

한편 나는 신란의 제자가 저술했다는『탄니쇼(歎異抄)』의 ‘악인정기(惡人正機)’설에 대한 기타지마의 견해를 묻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그것은 ‘악인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한 구제의 주된 정기(正機)’라는 설이다. 이 설은 ‘악인이 구제된다면 적극적으로 악행을 벌이자’라는 뜻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렇게 악용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기타지마의 답변은『탄니쇼』의 기록방식이 잘못 되어 있다. 신란은 오히려 그런 오해와 악용을 우려하여 ‘약이 있다고 독을 좋아하지 말라’는 경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해도 ‘악인정기’란 일종의 궤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그 오해/ 악용을 막지 못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

이은선은 신란의 가르침에 담긴 저항정신을 평가하고자 했다. 국가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할 경우 이에 저항할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신랄한 질문을 던졌다. 왜 정토신종을 비롯한 일본불교/계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지 못했던가 라는 것이다. 기타지마는 반성을 담은 답변을 했다: ‘역사적으로 국가권력에 저항했던 적이 있으나 그런 만큼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이에 따라 국가에 의존하는 성향이 커지고 타락했다. 이윽고 제국주의에 봉사했다’라는 것이다. 덧붙여 ‘전후 일본불교/ 계 일부는 자기비판이나 참회를 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투쟁하기도 했다’면서 이해를 구했다. 이에 김태창주간은 일본 불교/ 계의 비판은 좋으나 ‘기타지마선생은 존경할 분’이라면서 대화를 중재했다.

오후회의는 일곱 번째 발제자 황상희(성균관대 강사)의 ‘노년기 이황(李滉, 1501-1570)의 삶과 사상’으로 시작되었다. 퇴계(退溪) 이황은 조선시대의 4대사화를 거의 모두 겪었던 사람이다. 태어나기 3년 전인 1498년의 무오사화, 4살때인1504년의 갑자사화, 19살 때인 1519년의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관료시절이던45살때인1545년에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그도 일시 관직이 삭탈되는 일을 겪었다. 게다가1550년에는 그의 넷째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가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지로 이동하는 중에 사망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퇴계는34세때 과거에 급제한 후 조정에 나아가(進) 49세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그사이 46세때에 장인과 부인 권씨가 사망했다. 그러자 문상(問喪)을 이유로 고향 안동에 돌아가 토계(兎溪) 개울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다. 이때 개울 이름을 퇴계로 고쳐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양진’이란 ‘진리 기르기’를 뜻한다. ‘퇴계’란 ‘토계로 물러남’을 뜻한다. 즉 ‘정계를 물러나 여생을 학문에 바치겠다’는 뜻을 세웠던 것이다. 실제로49세 이후 ‘귀촌’하여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학, 주자학을 연구하면서 실천했다. 달리 말해 향촌 교화(敎化)와 개혁에 투신했다. 이로써 ‘물러남(退)’의 미학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후세의 귀감(龜鑑, 거울)이 된 것이다.

두말할나위없이 퇴계는 한국인 모두의 스승이다. 퇴계의 삶과 사상은 노인세대든 어떤 세대든 누구에게나 본받고 싶은 거울이요, 따라야 할 모델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오늘날과 장래세대를 위하여 퇴계의 삶과 사상을 어떻게, 얼마나 되살려 나갈 것인가이다. 이런 과제는 ‘노년/ 노인철학’의 몫이기도 하다.

황상희의 발제를 둘러싼 토론과 대화의 내용은 생략한다. 다만, 하나만 소개한다. 첫 토론에 나선 오하시켄지(大橋健二, 스즈카[鈴鹿]의료과학대학 강사)는 ‘퇴계를 잘 모름’을 겸허하게 밝힌 후 발제로부터 배운 것을 피력했다. 예컨대 ‘자존을 내려놓고 재야로, 향촌과 서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하여 시대와 현실을 품었다’는 것이다. 또는 ‘영혼과 인간이 교감하는 인(仁)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대학>의 삼강령(三綱領; ‘明明德, 親民, 止於至善’)을 언급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따사로움과 이어짐(繋がり)의 관계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알 듯하다. 나 역시 30여년 살아보니 일본은 ‘차가운 사회’요, 일본인은‘ 이어짐이 약한 인간관계속에 있음’을 느끼는 때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발제자인 오하시켄지는 ‘노년기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 1619-1691)의 삶과 사상’을 발표했다. 그는 먼저 ‘초고령사회, 노인대국’ 일본의 여러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현대 일본의 답답함과 살기 힘듦’을 토로했다. 그런 다음 ‘나이든 인간이 일하는 것 외에 순수하게 사는 것 자체를 즐기고 충실하게 해주는 삶과 철학은 어떤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 답을 양명학자인 반잔의 삶과 사상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오하시는 반잔의 ‘어려서 배우고 자라서 실행하며 늙어서 가르친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늙어서 가르침’을 ‘천지자연의 조화에 합류하여 보다 나은 사회와 다음 세대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함께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뜻에서 반잔의 사상은 ‘조화참찬(參贊, 참가와 찬조)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특히 노년기의 반잔은 ‘서월경운(鋤月耕耘),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세계를 그리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와 비견하고자 오하시는 유학자이자 박물학자인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1630-1714)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야규마코토(柳生眞, 원광대학연구교수)가 토론에 나섰다. 야규는 이미 ‘기와 양생의 철학’을 주제로 삼은 제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8월7일~8일)에서 에키켄, 그리고 최한기를 발제한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두 발제문은 동양일보 5월 14일자의 10면과 11면에 실려 있다. 토론에 나선 야규는 이렇게 물었다: ‘천인일체(天人一體), 자연 속의 인간,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식의 삶으로 충분할까? 오하시의 답은 ‘그렇다’였다. 그 이유는 이렇다. 현대 일본인은 ‘천인합일’ 특히 ‘무위자연의 무위’를 즐기는 시간을 잃었다는 것이다. 반면 ‘고독을 즐기라’는 말이 최근 일본에서 범람하는데 이를 오해하면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런 말이 일본인을 ‘고(孤), 폐(閉)’에 빠뜨린다는 뜻이다. 오하시는 일본/ 인의 ‘독존, 폐쇄성’을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야규와 오하시 사이에는 반잔, 에키켄의 해석을 둘러싼 대화가 이어졌다. 예컨대 그들이 말하는 ‘삶의 즐거움’이란 ‘양생(養生)과 욕심 줄이기’를 함의한다. ‘천지합일’이란 ‘천지와의 조화를 통해 편안한(安らかな) 마음을 즐기라’는 뜻이다. 이런 뜻의 ‘즐거움’은 최한기의 그것과도 통한다.

이런 대화의 흐름에 야마모토교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사장)가 끼어들었다. 반잔의 학문은 ‘리와는 멀다’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이전에 ‘내가 해주었던 말’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에게 일본사상사의 특징에 관하여 두 마디를 해준 적이 있다. 하나는 전술한 ‘보편의 특수화’이다. 또 하나는 ‘리를 멀리하기, 빠뜨리기’이다. 즉 ‘리결(理缺)’ 현상이다. 이에 따른 각종 폐해를 말해 주었을 때 그는 경청하면서 공감을 표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야마모토의 문제제기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하긴 어려웠으리라. 오하시는 반잔에게도 ‘리가 있다’라면서 이런 이유를 들었다. 반잔이 ‘정치(막번)체제의 문제점과 천황의 존재방식’을 따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황은 문화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한편 ‘참근교대(参勤交代)는 막번체제의 유지책’이라며 비판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리가 있다’라고 한다면 일리가 있긴 하다. 그러나 필요 충분한 이유는 될 수 없다. 그 정도로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가 ‘리결’을 표상한다, 그 속에 투영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본사상사의 ‘리결’ 현상과 그 전통은 뿌리깊다. 그 폐해는 여전히 일본 곳곳에, 일본인 사이에 퍼져 있다.

한편 기타지마는 반잔과 그의 사상에서 ‘타자와의 관계(関わり)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를 물었다. 오하시는 솔직하고도 흥미로운 답변을 했다. 첫째로 ‘타자가 약하다.’ 왜냐하면 ‘그 역시 무사였기 때문’이며, 무사에게는 ‘민은 피치자로서 객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토지와 백성을 염려하고 걱정했다’는 것은 평가해야 한다고 곁들였다. 둘째로 ‘나혼자 기대지 않고(寄りかからず、頼らず) 살아간다’는 무사정신에 입각한 ‘주체성’을 언급했다. 그래도 ‘유학의 진리를 가나(かな)를 써가며 서민에게 알리고자 힘썼다. 주체적인 서민을 기르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덧붙였다. 그것은 사실이며 평가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계도 사실이며 자기비판, 극복도 필요하다. 또한 에도시대의 일본유학은 병학(兵學)에 압도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어서 한동안 최한기의 ‘통(通)’을 둘러싼 논의가 전개되었다. 종합하면 ‘통’ 한 글자로 타자와의 관계를 모두 표상할 수 있다. ‘통’은 그 알파요, 오메가이다. 최한기는 ‘통’을 얼마나 중시했던가! 그의 기학(氣學) 전체를 꿰뚫는 사상은 한마디로 ‘통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 아니, 한국의 전통사상의 뿌리를 ‘통철학’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이런 전통은 ‘노년/ 노인철학’ 세우기의 튼튼한 기초가 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회의가 끝난 뒤 만찬을 마칠 때까지 참가자 모두는 그야말로 ‘통’이 넘치는 시간을 보냈다.

셋째이자 마지막 날은 ‘화폭 기증식’으로 시작되었다. 김연숙(충북대 교수)가 딸인 화가 김선우의 그림 한 폭을 야마모토 사장에게 증정한 것이다. 그 ‘검은 배경, 노란국화’의 그림을 참가자들은 ‘황국광(黃菊光)’이라 이름 지었다. 김태창주간은 ‘노년국자(菊姿)’라는 글로 노인의 모습을 ‘국기(菊氣), 국향(菊香), 국광(菊光)’이라 표현했다. 멋진 표현이다. 그의 말대로 ‘시와 그림은 수편의 논문을 이기는 힘/ 덕이 있다.’ 그러면서 릴케의 시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 줬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과연 시와 그림, 음악과 비견될 ‘노년/ 노인철학’을 세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문제로다!

이날 회의는 아홉 번째 발제자인 조성환(원광대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생각하는 노년, 수양하는 사회’의 발표로 시작했다. 그는 공자의 ‘여욕무언(予欲無言) 즉 나는 이제부터 말이 없고자 한다’(<논어> 양화)를 화두로 잡았다. 자연은 ‘유덕무언 (有德無言)’ 아닌가? 이를 닮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없음’과 ‘비움(虛)’의 지혜를 배우라! 각성하여 영성적 삶을 살아라! 이것이 노년세대에게 필요한‘ 시후지도(示後之道 즉 후세에게 보여주는 도’(<세종실록> 24년 6월 16일조)가 아닌가! 이렇듯 엄중하고도 신랄한 화두를 조성환은 던진 것이다. 무슨 말을 더하리오. ‘씨알 있는 말, 참된 말, 리 있는 말, 살리는 말, 영혼 있는 말, 깨달음의 말’ 아니라면 버리고 비우자. 그리고 ‘내려놓기, 베풀기, 돌보기’를 하자. 그리하는 ‘노년/ 노인철학’을 생각하자.

열 번째이자 마지막 발제자인 야마모토교시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노인상’을 발표했다. 첫마디는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도덕 규준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헌하는 일이 노인의 사명이요, 책임이요, 그리고 능력이다. 이를 ‘깨닫고 실천하는’ 노인이 되자. ‘깨어 있는’ 노인이 되자. 이렇게 제언하고 싶은 것이다. 더하여 이렇게도 제언한다. “동아시아의 분단 상황을 해소해야 된다. 동아시아가 영혼의 자유에 눈뜨고 미래공창을 위해 연대하는 것은 긴요한 요청이다.” 거기에 담긴 양식(良識)과 깊은 뜻을 감지할 사람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불행한 역사’와 이를 인질삼아 새로운 불행을 계속 생산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장래세대에 불행을 전수하는 동아시아의 현실을 우려하고 엄중히 비판하는 양식적인 일본인의 한사람이다.

점심을 마친뒤 전체토론이 두어 시간동안 벌어졌다. 참가자 모두가 활발한 논의와 대화를 펼쳤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 소개하지 못하고 이 글을 마친다. 나름대로 제목을 ‘노년/ 노인철학 선언을 위하여’라고 붙이었다. 이 글은 앞으로 필요할지 모르는 ‘노년 /노인철학 선언’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살포시 담겨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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