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이 증평 문인 협회 증평지부장(전 증평군청 문화체육과장)

 

나는 일 년 중 2월을 가장 좋아한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2월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언덕과도 같다. 추운 겨울에서 갑자기 따뜻한 봄이 온다면 무척 혼란스럽겠지만 2월은 그런 혼란이 오지 않도록 완충역할을 해주는 고마운 계절이다.

모든 생명체가 자연스럽게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놓인 곳이 바로 계절 사이의 틈이라고 생각한다. 계절과 계절 사이도,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 밖에 모든 관계에는 적당히 벌어진 틈이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나는 이 틈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상대방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관계도 덜 삐걱거리면서 상대방에게 조금 더 다가가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계의 틈을 좋아하고 실천하고 있는 나를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그런 습관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의견 차이로 그 믿음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연간계획에 의한 학습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해당기관에 방문해서 담당자를 만났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한 좋은 프로그램을 언제 받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나는 정말 어렵게 준비해서 아무 조건 없이 주겠다는데도 싫다는 그분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 왜 이러지? 그 일에 대한 가치도, 예측되는 성과도 모두 나무랄 데가 없는데 왜, 내 생각을 몰라주는 걸까? 이분은 배려를 받을 그릇이 아직 안 되는 사람인 모양이군.’

나는 내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섭섭함을 나도 모르게 표정으로 내비치고 말았다. 그분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받아서 쌓아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는 다만 뭐든 지원해주고 싶어서 어렵게 준비한 건데…….”

“네, 알아요. 고맙지요. 그렇지만 저희는 그걸 할 여력이 없거든요.”

그 말을 듣고 가슴에서 묵직한 돌덩어리가 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졌다. 내가 배려라고 믿어왔던 그것은 그동안 내 안에 가두고 키워온 자아도취에 불과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가는 생각지 않고 내가 무엇을 주어야 내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가에 맞추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그동안 내 입장을 생각해서 한 번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나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억지로 떠맡기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분과 나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상대를 들여다보는 시각의 틈이 없었던 거였다. 틈이 없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는데도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그날, 들고 갔던 지원 계획에 달린 짝퉁 꼬리표를 슬그머니 뒷주머니에 넣고 돌아오면서 그동안 내가 믿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다 짝퉁이었으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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