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바람·구름이 머무는 곳

삼기저수지의 여름풍경
삼기저수지의 여름풍경

오늘도 신발 끈을 조여매고 길을 나선다. 날마다 걷는 그 길이지만 날마다 새 길이다. 자연의 풍경이 다르고 사람의 옷깃이 다르며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새들과 꽃들과 햇살의 온기와 서걱거리는 바람과 숲의 비밀도 다르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든 순간이 새롭다.

사랑하는 사람아, 당신 가슴에서 전해오는 숨결, 사랑의 속삭임과 빛나는 얼굴, 젖은 숲처럼 당신의 등 뒤에서 서서히, 문득, 깊고 느리게 꽃대 올라오는데 어제의 그것이 아니다. 하여 오늘 걷는 이 길은 새 길이다. 날마다 희망이다.

삼기저수지의 봄 풍경
삼기저수지의 봄 풍경

증평 율리는 이야기 천국이다. 조선 후기 책벌레 김득신의 이야기에서부터 삼기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등잔길과 비나리길, 석조관음보살입상, 그리고 주변 마을의 속살까지 엿볼 수 있는 신묘함이 있다. 때묻지 않은 자연과 마을의 이야기 속으로의 여행이다.

초정고개를 넘어 증평방향으로 가는 내리막길 우측으로 핸들을 틀면 ‘좌구산 제1관문’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그 옆에 있는 마을이 남차리인데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일품이다. 우리나라에는 어림잡아 1만3000 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이중 7000그루가 느티나무이고, 1200 그루가 팽나무다.

삼기저수지의 가을풍경
삼기저수지의 가을풍경

느티나무는 항상 바람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햇살도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팽나무는 5월이면 어김없이 홍갈색 꽃이 피는데 취산꽃차례를 이룬다. 가을이 되면 적갈색의 작은 열매가 열린다. 먹을 때는 씨를 빼내야 하는데 그 때마다 ‘팽’소리가 난다. 그래서 팽나무다. 어른들은 일 년에 꼭 한 번, 이 나무에서 꽃이 피어 꽃향기가 절정에 이르는 날 밤, 그 향기를 맡으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옛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에는 이곳에 평상을 깔아놓았다. 집 없는 사랑방인 것이다.

삼기저수지는 숲과 계곡, 하늘과 평야, 마을과 길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이다. 3km의 제법 큰 둘레길이 만들어졌는데 이름하여 등잔길이다. 호수는 깊고 푸르니 발걸음이 가볍다. 숲에서 바람 불어와 물살에 몸을 비빈다. 햇살도 덩달아 어깨춤을 춘다. 백범 김득신은 이곳에서 책을 읽고 시심에 젖으며 꿈을 키웠다.

등잔길 끝자락에 서 있는 석조관음보살입상. 말 그대로 돌을 깎고 다듬어 세웠다. 그 얼굴이 평온하다. 인간의 절박함과 굴곡진 삶을 애써 감추려 한 듯하다. 얼굴의 곡선과 두툼한 입술과 느긋한 눈빛이 자족한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화평과 개인의 꿈을 노래했다. 두 손 모아 합장하며 곡진함을 담았다.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부르며 허리 굽혀 기도하는 여인에게서 아득한 삶의 향기가 끼쳐온다.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

비나리길은 삼기저수지의 아름다움을 품고 1008개의 계단을 오르는 길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부처님도 만나고 예수님도 만날 수 있다. 토속적인 신앙으로 욕망의 오벨리스크를 잠재울 수 있다. 정상에 서면 호수와 자연과 황금들녘의 풍광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이마의 땀도 애써 닦으려 할 필요가 없다. 산들바람과 맑은 햇살이 어서 오라고 손짓 하더니 비루한 몸과 마음 모두 씻겨준다.

고음(苦吟)시인 김득신. 책에 한 번 몰두하면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제 오줌줄기로 착각해서 한참동안 바지를 내린 채 서 있었다니 그의 집착과 집념이 경이롭다. 한 글자라도 마음에 안 들면 흡족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으며, 한 번 손에 잡은 책은 수백 번, 수천 번을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수적석천(水滴石穿).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고 했다. 일생에 먹을 갈아 구멍을 내 벼루가 어디 한 두 개였을까. 한 일(一)자를 10년 동안 쓰면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했다. 외길 인생을 살아온 당신을 생각하니 먹향이 끼쳐온다.

별천지공원의 김득신 이야기
별천지공원의 김득신 이야기

별천지공원과 율리는 김득신의 스토리텔링이 가득하다. 책벌레 김득신과 거북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좌구산 MTB 코스도 인기 만점이다. 물치폭포의 비경도 좋고 캠핑장에서의 달달한 하룻밤도 좋다. 동네 할머니들이 직접 빚은 두부 맛도 일품이다.

브레히트는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라고 노래했다. 책은 지식의 최전선이다. 나를 더욱 강건하게 하고 지혜롭게 하며 풍미를 준다. 하산하는 길, 마음이 무겁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천근만근이다.
 

율리마을의 전경
율리마을의 전경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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