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가톨릭 사제이자 철학자인 이반 일리치는 사회가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은 ‘불구’가 된다고 말한다. 교육이란 ‘결핍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버렸다고도 한다. 일리치는 ‘결핍을 인정받을 권리’가 시민의 의무처럼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평생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의 ‘고객’으로 출생해서 ‘수요자’로서 학교를 다니고, 집과 음식이라는 상품의 소비자로서 평생을 산다. 지금보다는 나은 집, 더 나은 소비를 위해 천착하지만 종국에는 그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일리치는 말년에 한쪽 뺨에 자라는 혹으로 고통받았지만 그가 평생을 걸쳐 역설한 결핍을 받아들인다는 가치를 따라 현대의학의 치료를 거부했다. 그리고 2002년, 76살의 나이로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독일 브레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관습을 거부했기에 보수주의자에게는 ‘사상의 저격수’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시대를 앞선 성찰로 진보주의자에게는 불편함의 대상이었던 이반 일리치에게서 결핍을 받아들인 인생의 가치와 죽음을 생각해본다.

또 하나의 이반 일리치는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등장한다. 일리치는 제정 시대 부패한 러시아 관료사회에서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 여념이 없는 야심찬 관리이다. 어떤 관직에 임명되든, 자리의 조건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추고 그 대가로 화려한 상류 사회와 사치로서 인생의 위안을 삼는다. 남들이 부러워할 출세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찾아든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일리치는 비명만을 질러 대 가족들을 경악시킨다. 죽음 앞에서 그는 무기력하고 혼자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풍족함을 추구했던 삶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되묻는다.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 지인들은 하나같이 머릿속으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하고 계산하기에 바쁘다. 직장 동료의 죽음, 그의 공백이 자신들에게 미칠 슬픔보다 어떤 득실이 있을지를 먼저 계산하는 사람들. 소설 속 그들의 세속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끼다가도 이내 그것이 곧, 내게도 내재된 추악한 인간 본성의 민낯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문을 간 자리에서 위로랍시고 슬픔이 차오른 유족들에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건조했다. 세상의 기준대로 풍요로움만을 쫓다가 외롭게 죽어간 이반 일리치의 일생도 처연하다.

누구나가 살아가며 돈 걱정 없이 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속해있는 사회 속 공동체는 ‘얼마나 필요한 인간인가’로 나의 가치를 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돌아보라. 공동체 구성원은 누구나 그 자체로 소중한 인연들이다. 한줌 이익을 좇느라 주변의 살가운 관계들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의 계절, 이 가을에 돌아볼 일이다. 관계를 닦고 가꾸는 데는 시간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데도 우리는 그 관계를 대신할 서비스를 살 돈을 버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세상의 기준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이익과 손해를 가늠하며 서로를 대하는 관계에서는 누구도 철학자 이반 일리치처럼 주체적으로 살기 어렵다. 반면, 공감으로 다져진 관계 속에서는 서로가 불편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있다. 우리의 삶은 어느 쪽의 관계에 방점을 두고 있는가?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면 이익이 아닌 공감으로 관계를 빚을 일이다. 삶의 지혜는 열정적으로 사는 데서도 오지만, 그보다는 누구에게나 끝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온다.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하는 장군에게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의 저 유명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omento Mori)’를 반복해서 말해준다. 지금은 비록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에 자만하지 말 것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지혜롭다.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였던 라로슈푸코는 "우리는 귀중한 사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 직시했다. 그것이 타자의 한계이다. 같은 이름이었던 두 명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보며 훗날 우린 어떤 죽음을 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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