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날마다 생각하는 일 :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일본도쿄대학 명예교수·니쇼가쿠샤대학 교수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일본도쿄대학 명예교수·니쇼가쿠샤대학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들어가며

늙음에 대한 고찰은 옛날부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것에 관심을 돌린 적은 없었다.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77세. 5년 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도 없다. 홀로 살다 보면 집안일 때문에 하루에 3분의 1 시간을 빼앗긴다. 맑은 날에는 먼저 태양을 이용해야지라고 생각한다. 홀로 사는 노인은 자립해야 된다. 이와 같은 생각과 빈약한 그 실천을 하는 가운데 이번의 ‘늙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받게 되었다. 나는 이 주제가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거절할까 싶었으나 노년철학 구축을 제창하신 김태창 선생이 85세로 최근에 죽음에 직면하면서 이 주제를 세우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고,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하기로 했다. 아래의 이야기는 모두 내가 날마다 실감하고 있는 것이고 누구나 공통되는 일이긴 하지만, 하나둘쯤은 드물고 진기하게 여겨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지금 죽을 수 없는 사정

이젠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 죽을 수 없다”고 하는 사정은 노년철학 제1의 조건이자 구성 요소이다. 이것은 그 개인의 사정과 세대적인 사정의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1)개인의 사정

개인의 사정은 그 사람의 역사에 관한 것으로 상대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적을 수는 없다. 나는 일개 연구자이므로 문채(文債)가 두 가지 있으면 약간 구체적으로 할 말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다하지 않고 죽으면 하나는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또 하나는 어느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이 두 가지를 다할 때까지 죽을 수 없는 사정이 있다.

(2) 세대로서의 과제의식

나는 전쟁포기 조항인 제9조를 가진 현 일본국헌법 아래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 이 조항을 바꾸려고 하는 세력이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 조항은 풍전등화처럼 되고 있다.

폭력(무력) 앞에서 맨손으로 맞서자는 제9조는 나무 이상주의적이라고 하면서 사실상 군대인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하려고 하는 개헌 세력이 일본의 젊은이들까지 끌어들이려고 하고 하는 현실에 대해, 우리들 70대, 80대들은 헌법 제9조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는 세대적인 책임이 있다.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오늘날 일본의 노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책임의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 또 응원해 주시기 바란다. 여러분들도 개헌을 도모하고 있는 아베 정권을 일제시대 비판의 입장에서 굳세게 비판해 주시기를 바란다.

또 한 가지 세대적인 책임과제로써 북한의 인권억압을 종식시켜야 된다는 과제가 나에게는 있다.

나는 1959년에 도쿄에 나와서 대학에 입학했다. 논폴리(ノンポリ; 별로 정치적 입장이 없는 사람, 특히 학생)였지만,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60년 안보투쟁)에 참가하면서 미일이 가상적국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임을 알고, 사회주의 중국의 역사를 알게 되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 당시 북한은 비교적 건전한 사회주의국가였다. 1960년부터 시작된 중국-소련 논쟁 속에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고 있었던 점에서도 매력이 있었다. 1967년 조선노동당 제15회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유일사상체계를 채택한 이래로 가족 연좌제가 따르는 강제수용소가 공포의 근원이 되는 나라로 변질되어 갔는데, 나는 1966년까지의 북한을 자주(주체)의 나라로 지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인 처도 포함해서) 9만3000여 명도 북한으로 이주했다. 그 사람들이 북한에서 박해를 당하고 20% 이상이 1967년에서 1973년 사이에 강제수용소에 보내지고 목숨을 잃었다. 나는 이 사실을 1993년 8월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북한의 인권억압 반대, 강제수용소 폐절(廢絶)을 목표로 하는 인권운동 NGO를 만들어서 운동을 추진해 왔다. 1960년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사람들, 지금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고 있는 사람들은 북한의 인권억압 상황에 대해 책임이 있다.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도 같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북한의 강제수용소 폐절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 신변 정리

내가 반생애를 살아온 증거로 내 곁에는 종이매체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내가 죽은 뒤 그것을 제대로 분류하여 정리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만, 나는 유명인사도 아니기 때문에, 또 자식도 없기 때문에, 그 자료는 휴지조각으로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 속에는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보물과 같은 자료가 있다. 따라서 자기를 소중히 한다면, 자기 생애를 소중히 여긴다면, 자기 주변의 정리는 스스로 해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선인들 중 두 분은 의식해서 그것을 하고 나서 세상을 떠나셨다. 아마 집안일을 빼고 하루의 절반은 그것에 시간을 써야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을 사는 데에 바빠서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평소 인간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사람의 두뇌는 그 평생에 의해 매우 풍요로운 내실을 형성하고 있다. 그 두뇌가, 그 사람의 풍부한 감수성이 그가 죽는 것과 더불어 허무로 돌아가고 만다. 하다못해 그 만분의 일이라도 구해내기 위해 노년기에 들어서면, 신변의 문서들을 정리하고 그 사람과 관련되는 것이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뽑아 파일로 만들어서 공책에 항목만이라도 적어두어야 할 것이다. 일기는 귀중한 개인사이다. 하지만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하다못해 정리라도 해 두어야 한다. 마침내 그것들도 모두 잿더미가 된다고 하더라도 잠시나마 이 세상에 남게 될 것이다.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앞에서 말한 바와 북한 인원회복 NGO활동 등의 기록은 특별히 정리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넘겨야 할 것이다.

●오래 살아보고 알게 된 것의 총괄

오래 살아봄으로써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는 청년시대에 마르크스주의를 자기 사상으로서 선택했다. 그러나 반세기를 살아보면서, 특히 최근에 와서 마르크스주의를 풍요롭게 하고 발전시키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인권의 사상이 인류가 낳은 최고의 사상이고 마르크스주의도 앞으로 인권사상 밑에 자리매기지 않을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1994년부터 시작된 북한인권회복운동이라는 인권활동의 성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역사적 산물을 계급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그 계급성을 지적한다. 과거의 인권사상이 얼마나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때의 지배계급의 뛰어난 산물일 뿐이라는 식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올해 70주년을 맞이하는 세계인권선언과 그것을 구체화시킨 1966년에 제정된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계급제도를 뛰어넘은 보편적 진리를 구현하고 있다. 후자의 제10조인 ‘자유를 빼앗긴 모든 사람(주: 형무소의 죄수)은 인도적으로, 또한 인간의 존엄을 존중되어서 취급받는다.’는 계급성을 규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관이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아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물론자로서 종교는 가져서는 안 되는 관념적인 것, 반동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최근에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통해 종교는 인생관(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인생관(종교)을 개인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신적인 것이라는 세 가지로 나누고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등)를 두 번째의 사회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종교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종교관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일본국 헌법 제9조 전쟁포기 조항의 사상적 연원을 찾다가 톨스토이의 <신약성서> 연구를 알게 되었고, 그 속에서 이와 같은 종교론과 만나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마태복음> 5장 39절 “악인에게는 맞서지 마라”를 발견하고 이것이 바로 비폭력주의의 원점임을 알았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기독교인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나고 평가가 높아졌다. 톨스토이의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톨스토이를 따라 마르크스주의자도 종교관을 바꾸어 간다면 마르크스주의가 매우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두 가지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1-(2)의 과제를 푸는 가운데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노년의 산물이다.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생각(마음)

마지막으로 이 생각은 지극히 최근에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에도시대의 철학자인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은 이 생각, 이 마음이 없는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장년이 되어서 하루에 세 번씩(아침・낮・저녁) 성묘를 했다.(만년은 두 번씩이 되었다.)

‘보본반시(報本反始)’란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중국 고전인 <예기(禮記)>의 교특생(郊特牲)편에 나오는 말이다. 최근까지 나는 이와 같은 생각이 없었다. 5년 전에 아내를 잃었으므로 무덤을 짓고 한 달에 한 번씩 성묘를 하고 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보본(報本)의 ‘본(本)’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와 국토와 사람들로 생각하면 그것에 감사하면서 보답해야 된다는 마음이 솟아나온다. 특히 내가 생을 받은 시대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특히 마음이 통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이 마음은 나이든 지금의 나에게는, 장차 이 세상을 떠나는 나에게는 절실하게 되어가고 있다.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은 주요 저서인 <현어(玄語)>에서 ‘보본반시(報本反始)’를 ‘감시사본(感始思本)’으로 바꿔 말했다. 이쪽이 보다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생각, 이러한 마음은 노년기에 특히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노인철학의 요소로 보고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핵가족화하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생각은 약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시(始)와 본(本) 중에서 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본’ 속에 자연과 친한 사람들과 지금의 평화를 넣으면 생생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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