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이 보인 늙음의 의미와 가치: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충북 옥천 출신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씨에 ‘자’를 붙여 ‘송자’로 불린 ‘대로(大老)’의 성리학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회자되었던 성리학자이며 봉림대군의 스승이다.

노년기 우암이 시골 초려에서 보낸 삶은 넉넉한 삶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암은 자급자족 생활을 이어가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노욕을 줄이면서 ‘올곧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었기에 우암을 통해 늙음의 의미와 가치를 새밝힘할 수 있다. 공공재산으로 환원함으로써 우암은 주변에 풍요로움을 선사하였다.

먼저 우암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주경(主敬)’의 수양공부를 이어갔다. 우암에게 늙음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 수용의 의미로 나타났다. 흔히 늙어가면서 스스로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거나 되돌아가서 현재의 늙은 모습을 부정하는 경향이 많아진다. 그러나 우암은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과 정반대의 현실로 투영되어 있는 손자의 모습에서 마음의 평상심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늙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우암에게 ‘주경’공부는 우주생명 이치를 탐구하며 인간본성을 회복하고, 생명이치에 따름으로써 생명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공부를 말한다.

또한 우암은 노년기에 이르러 ‘옳음(義)’의 사색을 지속하였다. 점차 쇠약해진 자신의 건강으로부터 스스로의 학문적 고립과 나태함을 절감하면서 옳음의 의미를 성찰하고 반문하였다. 그에게 옮음의 반대 의미는 ‘그름’이라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구함’이다. 그는 ‘옳음’의 원칙으로부터 ‘이익’을 마주대하고 ‘이익’을 앞세워 이익을 탐하는 도리를 사색으로 경계하였다. 특히 제도적 모순과 그 역할의 회복을 마음에 두면서, 경직된 판단과 편견에서 벗어나 시의적절한 생각을 파고들면서 심사숙고하였다. 이를테면, 주자가례 관점에서 보면, 당일 제사지낼 한 분의 위패만을 모시고 제례를 치르는 것이 원칙이다. 우암은 주자가례 원칙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한 자리에 모시는 파격으로 정감을 살리면서 배려의 폭을 넓혀갔다.

그리고 노년기 우암은 나이가 들수록 일에 대한 반응, ‘응사물(應事物)’로서 ‘올곧음(直)’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흔히 옳은 생각은 하기 쉽지만,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인간 마음이 욕심으로 치달아 올곧음은 왜곡되고 굴절되기 쉽다. 늙음이 깊어갈수록 노회하게 되고 그 굴절이 심각해지기에 편파적이며 굽은 노인이 되기 쉽다. 그래서 노인을 ‘꼰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비꼬기도 한다. 노인이면서 ‘꼰대’가 되지 않고자, 우암은 인욕과 천리 사이를 ‘올곧음’으로 매개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우암에게 ‘올곧음’은 노년기 빈곤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실천적 처방이다. 노년에 들면서 우암은 ‘늙음’, ‘병듦’, ‘죽음에 다가섬’이라는 세 고통에 직면하였다. 그는 과거시절로 회귀하기보다 노년으로 살아가는 대안을 모색했다. 초라하고 불쌍하며 외로운 늙은이로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일상을 ‘올곧음’으로 매개하려고 노력하였다.

남인 출신,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원자로 책봉하고 종묘에 고하였다. 우암은 인현왕후가 젊은데, 후궁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반대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화가 났다. 종묘에 고한 것을 번복하라는 주장은 대역죄에 해당하기에, 우암을 제주로 유배 보냈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국문해야 한다며 한양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숙종은 국문으로 인한 정치파장을 우려하고, 금부도사를 보내 우암이 정읍에 도착했을 때 사약을 내렸다. 사약을 받은 송시열은 금부도사가 건넨 사약, 세 사발을 마시고선 83세로 숨을 거두었다.

노년기가 깊어갈수록 노욕이 나타나서 천리보다 인욕에 사로잡히기가 쉽다. 우암은 이에 대한 실천철학으로써 ‘생명 사랑-옳은 생각-올곧음 실천’의 삼원사유를 이어갔다. 생명 사랑으로 자신의 기운도 활성화하면서 생각을 할 때마다 옮음의 기준에 두고 옳음의 생각과 이익을 향하는 경계선에서 일상에서 올곧음으로 실천하는 삶을 자신에게 주문하고 실천했다. 스스로 이 실천에 앞장섰기에 우암은 ‘송자’로서 존중되었다. 현실에서 맛있는 것을 선호하고, 즐거운 것을 보고지고, 남녀 애욕에 이끌리더라도, 탐닉 대상을 향해 오감을 사용하기보다 ‘올곧음’을 이어주고 매개하다보면, 인욕과 천리의 갈등에서 벗어나 올곧음을 유지할 수 있다.

우암은 조선조가 행한 주자의 사창(社倉)제도에서 하급관리가 원칙에 매달려 충실하면 할수록 때에 맞추어 적합성을 찾는 ‘시중(時中)’의 묘책을 함께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조선의 곡물대여 기관으로서 알려진 ‘사창’은 노년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면서 동시에 나라가 관할하는 곳으로 사회적 공공성이 있는 ‘관아’로서 역할을 하였다. 우암은 백성에게 보다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는 여지를 사창제도를 통해 살리고자 하였다. 말년의 우암은 나라가 자신에게 부여한 봉록까지 반납하면서 노욕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자신의 경향성을 ‘올곧음’으로 성찰하고, ‘서추’로부터 과분하게 받았다고 생각한 봉록마저 되돌려주는 결단을 실천에 옮겼다.

노년기의 우암을 통해서,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실천철학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태도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날 때만다 항상 ‘옳음’의 기준을 염두에 두고 옳지 않은 생각을 멈추거나 폐기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생활실천으로 이어가고자 ‘올곧음’을 실천 잣대로 삼아 풍속을 고려하면서 경직되지 않도록 항상 살피도록 함이다. 아울러 ‘이익’을 택하기보다 ‘올곧음’을 택하는 일관성을 견지함으로 노인 주체성을 스스로 살림을 일깨워 주었다.

우암이 ‘올곧음’을 향심으로 삼아 공부한 일상을 <송자대전>에 나타난 다음 구절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내 일생동안 착하지 않은 점이 있었지만, 이를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록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착하지 않은 점이 발견되면 다른 사람에게 모두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오로지 이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마음은 ‘올곧음’으로 주자가 실제로 전수받은 것이며 공자가 말씀하신 바이다. 이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원칙은 ‘올곧음‘’이고, 이것이 없는 삶은 다행스럽게 죽음을 면할 뿐이다. 맹자가 말한 바이지만,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하여 거짓이 없으니 비록 천만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 앞에 당당하게 나가겠다.’고 다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올곧음으로 기르며, 해가 없더라도 천지에 가득 찬다.’ 주자가 공맹 도통을 계승한 것은 오직 이 한 글자뿐이다.” 하였다.

우암이 은거하며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 구곡을 ‘화양구곡’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화양동 계곡은 괴산 선유동 계곡과 7km거리에 있으며 푸른 산과 맑은 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화양 제1곡은 ‘경천벽(擎天壁)’으로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며 우암의 ‘주경’을 닮아있다. 이 바위에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우암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한 화양 제4곡은 금모래 ‘금사담(金沙潭)’으로 화양구곡 중심으로 우암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새겨 ‘옮음’을 바로 세우고자 학문을 연마하였고 후진을 양성한 곳으로 알려졌다. 화양 제9곡은 ‘파천(巴串)’으로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을 찾아 이곳을 찾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넓은 반석 위에 앉기를 원한다. 이 반석은 우암의 ‘올곧음’을 표상하기에 오랜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리고 많은 세월을 견디며 반석이 되어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노년기 우암을 통해, ‘늙음’은 ‘생명을 깊이 사랑하자는 의미’로 다가오며, ‘올곧음’은 ‘그것의 실천가치’로서 체화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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