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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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지난주 보은 내북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재능기부로 미술 수업을 부탁받고 다녀왔다. 필자가 아동미술전문가이며 서양화가이기 때문에 시골학교 어린이들에게 미술특별수업을 부탁한 것이다. 5, 6학년 학생 전원을 상대로 찍기놀이로 창의적 표현활동을 하였다. 각종 단풍잎, 낙엽, 풀잎.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교정에서 줍고 모아서 다양한색으로 찍어 주제를 개성적으로 표현하게 하였다. 시골 아이들이라 정말 순진하게 즐거워하며 활동에 몰입하였다.

그런데 5, 6학년 학생수가 8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교생 학생수가 34명밖에 안 되는 초미니 시골학교였다. 그러나 학교건물은 2012년도에 농촌모델형으로 새로 지어져 건물도 아름답거니와 수목이 잘 어우러져 공원속의 호텔 같은 학교였다. 수업후 교장선생님 안내로 교정을 둘러보았다. 본관건물 뒤편 편백나무숲속엔 청살모가족과 산비둘기 부부도 금술 좋게 살고 있었다. 운동장도 말끔한 인조잔디구장이 연초록으로 깔려있고 트랙도 우레탄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교 본관건물 뒤편 응달에는 그 흔한 잡초도 보이지 않는다. 양달은 햇빛이 잘 드는 지역을 말 한다. 일단 햇빛이 드니까 항상 밝다. 햇빛은 열에너지를 많이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겨울에 따스한 담벼락 양달쪽에 쪼그리고 옹기종기 앉아 조잘대던 기억이 새롭다. 양달엔 많은 식물이 햇빛을 이용해 살아가므로 다양한 식물이 잘 자란다. 반면에 응달은 양달과는 반대의 현상이 있다. 어둡고 온도가 낮아 추우며 양달보다 적은 식물들이 자라고 대부분의 동물이나 곤충도 잘 찾지 않는다. 학교시설을 돌아보는 중 교실에서 “네! 네! 선생님.”하며 공부하는 소리에 문득 이 아이들의 형편을 생각해 보았다. 이 학교 어린이들의 형편은 양달과 응달 중 어디에 속할까? 왠지 양달이라기 보단 응달쪽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시골 초미니학교에서 근무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뻔하다. 왜냐하면 34명중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 다문화 가정, 한부모가정, 조손가정에 속한다. 그리고 어쩌다 전학 오는 아이들을 보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골로 오거나 부모가 문제가 있어 오는 아이들이다. 참으로 교육자였던 필자로서 가슴이 아리다. 이 어찌 어른들의 잘못이지 아이들에게 무슨 슬픈 멍에인가.

그래도 이 아이들은 낯선 나를 마주칠 때마다 밝은 미소로 “안녕하세요?” 하며 배꼽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는 행복씨앗학교로서 댄스동아리, 드론체험, 토털공예, 외발자전거타기 등 상상외의 방과 후 활동과 다양한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생각키움, 마음키움, 나눔키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존중과 배려의 문화를 체험시켜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적 학교문화를 실천하고 있었다. 요즈음 읍 소재지나 시내 학교 어린이들은 하교하자마자 교문에서 학원 차에 실려 가든지 아니면 곧바로 엄마가 자가용에 태워 각종 학원이나 교습소로 간다. 어찌 보면 시골학교 어린이든 도시학교 어린이든 다 문제점은 안고 있다.

옛말에 ‘양달산토끼와 응달산토끼 중 어느 토끼가 더 클까?’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양달산토끼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응달에 사는 산토끼가 더 크다고 한다. 양달에 사는 놈은 굴 밖으로 응달만 보고 사는데 응달에 쌓인 눈을 보고서 아직도 겨울이구나 하고 나올 생각을 안 한단다. 반대로 응달에 사는 산토끼는 양달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녹은 걸 보고 굴 밖으로 나와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먹이활동을 한단다. 그러다 보니 응달쪽 산토끼가 몸집이 더 크단다. 어디에 사느냐 보다도 어디를 보고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우쳐 준다.

비록 농촌 시골학교어린이들이지만 더 높은 꿈과 희망을 갖고 자라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 보다 더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 아닌가! 요즈음에는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된다는 속담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교육자들 모두가 교육에 대한 사명감의 횃불을 들어야 한다. 그들과 함께 국가와 사회도 이웃도 꿈나무 키움기 정열의 기름을 쏟아 부어 활활 타오게 해야 할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슬픔의 날을 견디노라면...’ 푸시퀸의 ‘삶’이라는 시를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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