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우리 집에는 고등학교 1학년 다니는 아들이 있다. 매일 아침 아들을 깨우느라 씨름 하는 아내도 안쓰럽다. 하지만 지친 몸을 비비꼬며 “몇 분만 더”를 외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고 애처롭기 그지없다. 무엇을 위해 온 가족이 매일 아침 이런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이 우리 아들이 미래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가 아닌가 싶다. 어젯밤에도 12시 넘어 영화 보는 아들에게 “그런 것 보아서 뭐 해 쓸데없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영화 보는 것이 나쁜 짓은 아니겠지만, 거기에는 잠시라도 공부를 더 하여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쓸모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돌이켜 보면 나도 평생 이런 얘기를 들으며 살아온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에 만화를 보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고, 교과서나 참고서를 읽으면 시간을 알차게 쓰는 것이었다. 영어 원어민 발음을 듣기 어려웠던 시기 임에도 팝송을 들으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꾸중을 들었다. 대신 영어사전을 펴 발음기호를 외우면 칭찬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변한 것 같지도 않다. 내 아들에게 그렇듯 항상 쓸모 있는 인간,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소파에 누워 멍 때리기를 하다가도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운동을 하든지, 책을 읽든지,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든지 어쨌든 무언가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지 않으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진정 원하는 행복일까? 쓸모 있기 위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 하는 모습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가?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많이 습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산다. 얼마나 많은 직장인이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선술집에서 근무를 하는가. 누군가는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틈틈이 짬을 내어 학원으로 학교로 달려간다. 어떤 사람은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일 삼아 헬스장으로 공원으로 뛰어 다닌다.

그런데,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 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 아닐까? 누구나 좋아하고 가늠할 수 있는 세련되고, 어른스럽고, 손해 보지 않는, 정상적인 것들 안에서는 기존의 고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틀 안에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삶의 신바람도 기대하기 어렵다. 소파에서의 멍 때리기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 최고의 혁신가인 고 스티브 잡스는 젊었을 때 쓸데없는 짓을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리즈 대학 철학과에서 한 학기 만에 중퇴한 후 캘리그래피 등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만을 청강하며 히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쓸데없는 일이 후일 그의 성공의 자양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쓸데없는 일이 축적되어 뒤늦게 꽃을 피운 것이다. 동양의 철학자 장자가 말한 ‘쓸모없는 것이 후일 크게 쓰여 진다’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상황이 생길까? 쓸모가 있고 없고는 너무나 주관적이고 일시적이며 상황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유익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 오늘 유익한 것이 내일은 유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도 주워진 상황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는가. 따라서 오늘 쓸데없어 보이는 일이 내일에도 쓸데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더구나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다양한 것이 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필요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어떤 보고서는 현재 직업의 절반은 20년 안에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일의 유용성을 준비해야 하는 아들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지금 쓸데없는 짓으로 보이겠지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실컷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무엇이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을 당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데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가?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