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꼬리를 물고 피어나는 시골풍경, 농사를 경전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

남하리 석조미륵보살입상.

가을엔 비우고 채우며 젖는다. 하늘 높은 곳,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오방색 물감질로 내 마음 속 깊이 스며들더니 숲의 가장자리가 바스락거리며 애를 태운다. 푸른 들녘은 황금빛 물결 출렁이고 논길 밭길을 오가는 농부의 주머니 풍년이다. 텅 빈 대지에 마지막 남은 구절초 꽃, 햇살에 서걱거리는 마른 억새, 그리고 찬바람만 괜한 심술을 부린다.

가을엔 몸과 마음이 비옥한 내면의 시간이다. 지혜가 익고 삶이 성숙해진다. 사사로운 것들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 두리번거린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삶의 애증을 빈 잔에 털어 놓고 새로운 꿈을 담는다.

그래서 오늘은 증평 남하리로 발길을 옮겼다. 남하리는 농경의 마을이다. 신화와 전설이 오롯이 남아있다. 두레와 농요가 살아있는 농경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풍요로운 논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 뒷산에서 소쩍새 슬피 운다. 그 사이로 물길, 들길, 사람의 길이 있다.

농부는 정직하다. 뿌린 만큼 거두기를 바랄 뿐이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농부들에겐 자연은 하나의 경전이다. 하늘과 땅, 햇살과 바람, 그리고 농부의 마음이 만나 값진 결실을 맺는다. 고샅길 느티나무가 밤낮으로 갈색잎을 쏟아 놓더니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들녘도 쓸쓸하다.

민속체험박물관은 남하리 농경문화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넓은 잔디밭과 장뜰두레전시관, 향토자료관, 공예체험장, 한옥체험장, 문화체험관 등의 시설이 있다. 그 옆에는 두꺼비 연못과 야외체험장, 전통놀이마당이 있다. 매년 봄에는 마을 주민들과 도시의 호기심 가득한 가족단위 체험단이 와서 모심기를 한다. 다시 가을이 오면 벼베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는 농요가 있다. 바로 장뜰두레농요다. 2017년에는 한국민족예술축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모를 심을 때, 잡초를 뽑을 때 아랫집 윗집 모두 모여 함께 일을 했다. 모를 심고, 잡초를 뽑을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춤사위도 곁들였다. 노래는 고단한 삶을 달래는 간절함의 표현이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리듬이기도 했다. 노래와 춤사위에 맞춰 심기도 하고 뽑기도 했으며 쉬엄쉬엄 일하기도 했다. 그래야 일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 농요에는 초듭매기소리, 이듭매기소리, 세듭매기소리가 있다. 각각의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악보 없는 노래다.

남하리 염실 뒤편의 탑동마을 산기슭에 마애불상과 삼층석탑이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상군은 삼존불과 반가사유상, 그리고 여래입상을 한 곳에 조각해 놓은 흔치않은 불상군이다. 불상 아래 샘물이 있어 신령스러움을 더해준다. 삼층석탑은 자연암반위에 높이 2m의 크기로 서 있는데 단조롭지만 말끔하다. 한갓지게 즐기다가 삼층석탑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자. 자연도 무량하고 석탑도 무량하고 나그네의 마음도 무량하다.

남하리 민속체험박물관 옆에 있는 석조보살입상. 3.5m의 큰 불상 하나와 작은 불상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큰 불상은 두 귀에 장방형의 홈이 있으니 이곳에 보석같은 장식이 있지 않았을까. 불상 얼굴이 크고 길다. 미소가 가득하고 이마의 눈썹 사이로 백호(白毫)가 양각돼 있다. 두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오른손을 배 위에 붙여 외장을 하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연꽃을 잡고 있다. 풍요를 상징하고 평화를 담은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이 일대의 땅 상당부분을 갖고 있던 부잣집 주인이 고약한 성격에 욕심꾸러기였다. 어느 날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주인이 시주 대신 소의 오물을 퍼주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스님은 석불을 돌려놓으면 더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거짓으로 알려줬다. 이 말을 들은 부자가 석불을 북쪽으로 돌려놓았다. 부잣집은 오래가지 않아 망했다고 한다.

꽃이 피고 새 순 돋고 만화방창 녹음으로 가득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무들이 야위어간다. 귀뚜라미 소리도 야위고 숲도 야위어 간다. 논두렁 마른 억새는 바람이 슬쩍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온 몸을 부르르 떨며 흐느낀다. 산허리를 감싸고 있는 마을에 낡은 집이 두세 두세 모여 있다. 짙은 향기를 품은 연기가 허공을 향해 은유의 꼬리를 물고 가물가물 피어오른다.

풍경은 스스로 그러하다. 모든 풍경에는 상처가 깃들어 있다. 상처가 깊을수록 그 풍경은 더욱 진하고 간절하게 다가온다.

 

남하리 장뜰두레농요 모내기 풍경.
남하리 장뜰두레농요 모내기 풍경.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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