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UPDATED. 2019-10-17 20:38 (목)
동양칼럼/ 율곡이 화양동 선유동 쌍곡을 찾지 않은 이유 ②
동양칼럼/ 율곡이 화양동 선유동 쌍곡을 찾지 않은 이유 ②
  • 이상주
  • 승인 2018.11.05 2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주 중원대 교수
 
이상주/ 중원대 교수
이상주/ 중원대 교수

 

율곡은 황해도 해주로 가서 고산구곡을 정하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율곡은 영원무궁하게 빛날 미래의 핵심적인 문화가 무엇인지 예견했다. 그래서 용의 원력을 받아 완성하는 구곡을 정했다. 율곡은 해주일대를 중국과 문화문명의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문명을 융합창달할 수 있는 적지로 보았다.

여덟째, 용의 원력이 발복한 땅이 또 있다. 바로 충북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龍村里)다. 이 마을 앞개울에 용이 하늘로 솟았다는 못(沼)이 있어 마을 이름이 용소(龍沼)말이었다. 중봉 조헌(趙憲1544년~1592)은 지금 경기도 김포가 고향이다. 용촌에 용기(龍氣)가 서린 것을 알고 이곳으로 왔다. 그는 용의 화신인 율곡의 수제자다. 조헌은 율곡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그 자리가 지금 용촌리 도리밤티 ‘서당골’이다. 조헌은 율원구곡(栗原九曲)을 정하고 「율원구곡가」를 지었다. 용촌에 바로 인접한 산에 필자의 선조의 산소가 있다.

조헌은 도끼를 들고 가서 상소를 올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 즉 도끼 상소’로 유명하다. 그만큼 충직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용의 기상을 타고 났기 때문에 그런 기개를 발휘한 것이다. 조헌은 조일전쟁이 발발한 해인 1592년 5월, 옥천에서 문인인 김경·이우·전승업 등의 도움으로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7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관군과 영규대사가 통솔하는 승병 1,000명과 합세해서 청주를 탈환하였다. 그리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의 1만5천 왜군과 2차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대사의 800명 승군 등 전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전투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조헌을 포함한 전사한 조선군 700명의 유골을 모아 한 곳에 합장했으니, 곧 ‘칠백의총(七百義塚)’이다. 후에 조정에서는 조헌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이렇게 용들은 이렇게 용인 왕(王)과 용의 강토를 수호하기 위해 용력을 발휘하다가 산화했다.

아홉째, 일제강점기에도 용의 활약은 지속됐다. 지금 충북 충주시 동량면 용교리(龍橋里) 용대(龍臺)마을이 있다. 이범식(李範植 1898~1962)이 도를 밝히기 위해 명도구곡을 정하고 「명도구곡가(明道九曲歌)」를 지었다. 도는 바로 구오(九五)의 도이자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도이다. 이범식은 유인석(1842~1915)의 제자다. 앞서 보았듯이 유인석은 의병장이자 평안남도 개천 석계에 석계구곡(石溪九曲)을 정했다. 또 이범식은 이근원(李根元1840~1918)과 양두환(梁斗煥)을 사사하여 학문을 하였다. 다음은 2008년 8월 24일 일요일 ‘구곡리구곡’ 제8곡 용암(龍巖)에서 용암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이범식의 증손 이규봉(李奎奉1925~ )에게 들은 내용이다. “명도리는 충주시 산척면 명도리이다. 고향은 충주시 동량면 용교리(龍橋里) 용대(龍臺)이다. 길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일제시대 의병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였다. 의병들이 자고 가고 밥도 먹고 갔다. 일본군의 감시가 심해서 의병을 말에 태워 보내기도 했다. 할아버지(이범식)가 왜정 때 일본군을 피해 명도리에 가 있었다. 사위 김종성(金鍾聲)이 살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2009년 2월 22일 일요일 전화로 들은 내용이다. “치암(恥庵) 김호경(金皓經)이라는 분이 말하기를, ‘할아버지가 당나귀 안장에 총을 감추어 엄정면 목계까지 운반하게 한 적도 있다’고 했다한다.” 다음은 2009년 2월 22일 일요일 이범식의 아들 이찬종(李燦鍾1922∼ )옹께 전화로 들은 내용이다. “치암장(恥庵丈)은 고향이 충남 공주로 의암선생과 의병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머리를 깎인 채로 출감하여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하여 호를 치암(恥庵)이라 했다. 나라가 망해서 검은 갓을 쓰지 않고 늘 백립(白笠)을 쓰고 다녔다. 치암공이 나를 업어주기도 하고 개울로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했다. 해방 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손님들과 의병활동 하던 분들이 건너 방에서 대화하곤 했다.”

이렇듯 용의 화신들은 진충보국정신으로 용의 강역을 고수하기 위해 헌신 산화했다. 용비어천(龍飛御天)은 계속된다. 한반도에 용덕을 내리고 용의 원력으로 완성된 구곡문화를 통해 문화문명융성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용의 기를 내리고 감지뇌파를 발산하고 있다. 다음은 어느 곳에서 용기(龍氣)가 서기(瑞起)할까.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103 (율량동)
  • 대표전화 : 043)218-7117
  • 팩스 : 043)218-7447,7557
  • 창간 : 1991-12-29
  • 제보전화 : 043)218-722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원중
  • 명칭 : 동양일보
  • 제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 등록번호 : 충북 가 00003
  • 등록일 : 1991-12-27
  • 발행일 : 1991-12-27
  • 회장 : 조철호
  • 발행/인쇄인 : 유영선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영이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9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ynews@dy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