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오창창고 사건은 2007년 11월 13일이 되어서야 관련 희생자 315명이 확정되었다. 이어 유족 492명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생명권·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국가에 냈지만 소멸시효가 경과했다는 이유로 패소하였다. 그러자 유족들은 서울고법에 항소하여 2010년 10월, 정부의 손해배상책임을 이끌어 내었다. 정부는 즉시 상고하여 하였으나 대법원은 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상고심의 판결을 원심대로 확정하였다.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며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한 원심 판단을 수용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법적근거는 사실 “신의성실의 원칙”이었다. 이 로마법에서 유래한 신의칙은 근래에 와서 프랑스민법에서 처음으로 명문화하였고, 스위스민법의 영향으로 우리 민법은 총칙 편에서 일반원칙으로 적용하여 모든 사인관계를 포괄적으로 규율하게 만들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고,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추상적인 일반 규범이다. 우리나라 민법 2조는 권리의 행사나 의무의 이행은‘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는 이 근대 민법의 신의성실원칙의 기본원리로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권리남용의 금지”를 직시하고 있다. 따라서 오창창고 사건에서 대법원은 국가가 집단학살의 책임을 인정한 이상 소멸시효 항변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거부하는 것은,“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 이라는 판결을 이끌어 낸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장은 전국 각 도의 경찰 국장에게 전국 요시찰인과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즉시 구속 수감하라고 지시한다. 진천경찰서 사석출장소 소속 경찰들이 1950년 6월 30일 출장소에 구금됐던 10여 명을 진천면 성석리 할미성 고개에서 살해한 것을 보면 주동자로 분류된 보련원의 사살 명령은 좀더 빨리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7월 2일 북한군에게 원주를 내주고 7월 3일에는 한강선이 돌파 당했다. 7월 4일에는 수원마저 함락되고, 강릉의 8사단은 내륙으로 철수한다. 7월 5일부터 미 24사단이 투입되어 평택에서 대전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군은 소백산맥 일대에서 인민군을 막고 있었다. 당시 국군은 사단급 병력이 3000~8000명에 불과하였으나 7월 6일과 7일, 6사단 7연대 임부택 중령은 음성 북쪽의 동락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둔다. 그러나 7월 8일 1사단 12연대와 방어임무가 교체되면서 7월 10일 북한군 15사단에게 음성이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오창면 양곡창고 경계병들은 7월 9일 구금 보련원 중 주동자로 분류된 14명을 살해하게 된다. 같은 날,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에서 800 명이 집단학살 당하였다.

국군 2사단은 7월 11일까지 진천에 주둔하였다. 수도사단은 7월 12일 오창 화산리와 오근장의 인민군을 공격하고 13일은 미호천 전투를 치르고 14일에 남일면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국군의 퇴로 경로 속에 보련원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앞서 7월 11일 새벽에는 이곳을 지나던 헌병대와 군인은 오창창고에 구금된 보도연맹원 370명을 학살하였다, 이들은 오창면, 문백면, 진천읍 사석리 등지에서 예비검속 되어 창고에 4~5일간 감금되었다가 희생된 것이다. 30명 정도는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았다. 왜 하늘은 이분들만 살려준 것일까? 신의성실원칙에 반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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