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묵 영동교육지원청행정지원과장·수필가

 
임형묵 <영동교육지원청행정지원과장·수필가>
임형묵 <영동교육지원청행정지원과장·수필가>

 

2004년 3월 어느 날 오후, 신행정수도가 충청권으로 이전해오고 오송에 고속철도역이 들어선다하여 오창과학산업단지 아파트 분양 본보기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쟁률이 예상을 뒤엎자 ‘떴다방’이 진을 치고, 부동산 업체들도 총 공세를 폈다. 어른들의 ‘솜사탕 잔치’에 아이들의 학교문제나 공부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근심거리는 학교 울타리 안까지 날라들었다. 대우이안아파트 818세대가 입주를 시작한 2006년 1월, 오창과학단지내 공주택이 들어선 각리에는 2004년 새로 지어 이전한 각리초 밖에 없었다. 당시 2006년 9월 개교목표로 비봉초가 지어지고 있었지만 입주시기가 맞지 않아 미리 입주한 대우이안아파트는 물론, 그해 5~6월께 입주하는 쌍용예가와 한라비발디아파트 학생들은 우선 각리초를 다녀야 했다. 이런 사정에 주민들은 오창에 학교를 더 지어달라는 집회를 가졌다. 여기에 비봉초 학군 지역 3개 아파트 입주 주민들이 합세해 연일 민원을 쏟아냈다.

2006년 7월 각리초에서 공청회가 열렸지만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그해 8월 말 대우이안아파트 주민들이 대규모로 청주지법에 ‘통학구역결정 가처분신청’과 ‘통학구역 결정처분 취소소송’을 동시에 내 파국으로 치닫는 듯 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면 금방 비가 몰려오게 마련이다. 주민들의 요구와 바람이 교육청 입장과 너무나 달랐기에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할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뒷짐만 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찾아가는 것이 상책이었기에 과학단지 내 아파트 사람들에게 손을 넣고 ‘학교운영위원회 청원군협의회’ 임원들과도 협력해 고충을 나눴다. 그러던 중 우림1차 아파트 사랑방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오창과학단지 8개아파트 단지 입주자 대표회의’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한 끝에 2006년 4월 26일 첫 대면을 할 수 있었다.

학교운영위원회 청원군협의회 이종범 회장과 황용수 관리과장님, 그리고 고주영 주무관과 같이 아파트 대표들과 만났다. 처음에 그들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거칠게 굴었다. 눈빛은 표독스러웠다. 얼음벽 같이 차가울 것 같던 분위기는 이야기를 터 갈수록 녹아내렸다. 모임이 잦아지고 얼굴이 익자, 연일 민원을 올리던 아파트 단지의 분들과도 형님 동생 할 정도로 편해졌다.

그렇다고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입주자모임의 대표가 주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해냈지만, 뒤늦게 이사 온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진행내용을 전혀 몰라 아우성쳤다. 일부 주민들은 ‘대표자회의가 우리 입장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며 반기를 들었다.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 없었지만 주민들이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보를 얻으려 노력했다. 주민들이 싫어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탁상행정이기에 현장을 돌며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신경 썼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6월말 각리초와 비봉초를 분리하는 초등학교 통학구역이 확정됐고, 그해 비봉초 개교 전날인 8월 31일, 각리초에서 비봉초로 전학을 가는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던 각리초 아이들을 위한 환송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좀체 가시지 않았다. 만에 하나 지금 이 환송식장이 통학을 거부하는 투쟁의 장이 된다면 큰 낭패였다.

다행스럽게도 운동장에 가득 찬 아이들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학부모들도 많이 운집했지만 이상한 기류는 짐작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둘씩 손을 맞잡고 각리초 정문을 나와서는 800m가 조금 넘는 비봉초까지 줄지어 걸어갔다. 한 여름 8월이라 학생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지만 찬란한 태양에 빛나는 영롱한 이슬방울 같았다. 공무원 생활을 하는 오랜 기간 동안 학교 수용계획 및 학교 관리 업무를 맡은 이 시기만큼 힘들었던 때가 없었다. 기획력이 요구되든, 창의력을 필요로 한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겠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 힘들었다. 민원인을 상대하는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충의 연속이었다. 힘들었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2006년 9월 1일 비봉초 개교 당시에 학생이 348명이었는데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학생 수가 1100여명이 넘는다. 시위 피켓을 들고 목청을 높이던 사람들,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공청회장, 영문도 모른 채 엄마 등에 업힌 채 삐약삐약 거리던 갓난애들의 표정이 겹쳐 지나간다. 모든 기억들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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