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영(동국대학교 강사)

고령인구비율
유소년, 노년부양비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우리는 노인에 대한 보살핌 정책이 시행착오를 거쳐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노인을 대상화하는 정책은,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고대사회에서 노인을 존경하고 그들의 경험과 노련함을 얻기 위해 대했던 태도와는 시각적 차이를 보인다. 늙음은 현대와 고대에 똑같이 존재하지만, 노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왜 이와 같은 변화가 생겼을까? 늙음을 통계자료화 한다는 것은 사회의 보호테두리에서 그들을 가두는 것으로, 노년기의 안정화를 정책적으로 꾀할 수 있지만, 강조하다보면 유소년처럼 단순히 보살핌의 정책안에서 격리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과학과 정책들로 인해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어가는 것을 체감한다. 새것에 눈길이 가고 오래된 것은 점점 인기를 잃는다. 하지만 사람은 옛 동지가 좋고, 만남은 옛 친구가 편하다. 늙음은 배려하고 관리해야하는 대상에서, 격하되면 비경제적이고 사회적 손실의 대상이 되어 가는데, 노인에 대한 통계자료는 이 두 가지의 장단점에 대해 초점을 맞춘 것으로 노인문제에 대해 기획과 계획을 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경험 많은 옛 동지와 옛 친구에게서, 어떠한 것들을 도움 받았고 안내받을 수 있다는 통계 연구보고서는 받을 수 없으니 아쉽다.

과연 노인들에게서 우리는 배울 것이 없는가? 그들은 우리의 도움만이 필요한 존재인가? 사회 원로들의 지혜와 충고가 필요한 것은, 이런 과학과 정책이 무성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 속의 사각지대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을 그들에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그들이 가진 경험적 지혜를 발판으로 도약해야 하지 않는가?

이 글은 노인에 대한 통계자료가 가진 유용성과 더불어, 늙음이 가진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위상을 불교텍스트에서 경험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노인의 통계자료가 의미하는 것들



현대사회의 늙음은 고령화, 또는 노령화 문제로 사회적, 정책적 쟁점으로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다. ‘서울정책아카이브’에서는 노령화 지수(Aging Index), 고령화 인구비율(Aged Ropula- tion Rtio), 유소년·노년부양비(Dependency Ratio of Children and the Olders)에 관련된 조사된 통계와 자료를 내놓았다.(아래 표와 자료는 <서울정책아카이브>에서 참조.)

고령인구비율은 ‘65세 이상의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UN보고서 기준에 의해 7%는 고령화 사회, 14%는 고령사회, 20%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는 기준이 된다. 조사결과, 도쿄는 19.8%로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파리는 14.3%로 고령사회, 뉴욕은 12.1%, 런던은 11.1%, 그리고 서울은 9.6%, 베이징은 9.4%, 싱가포르는 9.0%로 7개 모든 도시가 고령화 사회에 이미 진입하였다. 서울은 노령화 지수에서 7개 도시 중 중간 정도이나 그 증가폭이 워낙 커서 이대로 두면 도쿄를 그대로 따라갈 것으로 우려된다.

도표 고령인구비율



‘서울정책아카이브’에 조사된 ‘유소년, 노년부양비’ 통계와 자료는 유소년과 노인을 부양하는 젊은 세대의 부담감을 사회 정책적으로 통계한 것이다. 국가정책에서 이런 통계자료는 보호해야할 약자들, 즉 유소년과 노인에 대해, 개인이 갖고 있는 부담감을 국가정책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도표 유소년 노년 부양비

노인의 통계자료가 의미하는 것은 노령화, 고령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세계적인 추세이며,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한 노후에서 죽음까지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둔 정책이 펼쳐진다면 이와 같은 통계자료는 기본적 배경이 될 것이다. 현대사회의 노인문제에 따른 통계자료에서 벗어나, 늙음이 가진 위상과 미학을 문학적으로 찾아본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해, 불교문학에서 늙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늙음의 미학과 위상



삶, 늙음, 병듦, 죽음, 즉 생로병사(生老病死)는 현대의학이나 생명과학에서만 국한되는 주제는 아니다. 붓다는 고통을 사성제에 포함시키고, 그중에 생로병사를 고통의 원인으로 언급한다. 고통은 인간존재의 주요한 역할을 한다. 과학이 발달하여 늙음도 늦추어지고 병듦도 줄었지만, 생명을 얻은 자는 이 네 가지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늙음은 변화되는 과정이라 그 소리 없이 찾아오는 조용한 만남은, 더 아련하고 아쉬운 고통을 자아낸다.

붓다는 죽음 직전에 늙은 몸을 이끌고 긴 여정을 감행했고, 이러한 에피소드는 초기불교경전에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불교도들에게 전한다. 붓다의 노년기를 다룬 작품인 초기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은 단순히 성자의 모습이 아니라, 늙어가는 노인이 공동체를 바로보고 느낀 예지, 충고, 원칙들로 꾸며져 있다. 붓다가 80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옛날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출가한 뒤 왔던 길을 역으로 오는 여행은, 공간적으로 250km 정도이고 시간상으로 걸어서 2-3개월가량이 소요된다. 왕사성에서 꾸시나가라까지 유행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들로 엮어졌다. 80세 노인에게는 힘겨운 길이다.(이하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 참조)

붓다가 살아있을 당시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사회 격변기에 해당하며, 도시화 현상이 가속화되었던 때였다. 붓다가 열반경 속에서 설했던 내용들은 국가, 사회, 개인, 상가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중추적인 원리들이었다. 세간과 출세간의 공동체 모두에게 설했던 내용은 종교인으로 충고하기도 하였지만, 늙어가는 노인의 경험이고 노련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밧지족을 위한 국가공동체의 원리로서의 ‘7불쇠법’을 설명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자주 모이고 많은 모임을 갖고, 통일적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이미 정한 규칙을 어기지 않으며, 노인들을 공경하고, 여성들에 배려하고,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탑묘를 공경하라’는 등의 내용을 피력한다. 국가성장과 번영을 기대한 내용이다. 이 중에 ‘노인들을 공경하라’는 의미는, 그들을 통해 예전의 전통과 경험을 배울 수 있기도 하고,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노인들의 경험은 훌륭한 충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석서는 이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노인들은 지식과 덕망을 가진, 성숙한 노인을 뜻한다.

초기열반경에서 간헐적으로 인간붓다로서 고뇌를 경험하게 되는데, 늙어가는 붓다자신에 대한 회환이 또렷하게 기록된다. 붓다는 열반직전의 긴 여정 동안, 세월의 무상에, 속절없는 몸의 변화에 대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예감하고 자신이 보고 있는 자연풍경의 아름다움과 대비적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아난다여! (내가 여러 차례 보아왔던) 베살리 도시가 아름답구나! 고즈넉한 탑묘들로 훌륭하구나!…여래가 원한다면 일 겁이나 일 겁 남짓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상 장면은 붓다가 생전에 머물던 곳을 둘러보고 삶이 다함을 느꼈고, 더 오래 살기를 희망한 문구들로 유명하다. 자신이 지금 앞에 보고 있는 베살리 도시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베어 나온다. 또한 일 겁 이상을 더 이 세상에 머물고 싶은 심정을 자연스럽게 토로한다. 눈앞에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담아두고 싶어 했다. 인간붓다가 죽음을 앞에 두고 늙어가고 있음을 고통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은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다.

아비다르마 텍스트 중에 일부인, 까따바뚜(Kathāvatthu)에서는 “늙음과 죽음이 과보(果報)인가?”라고 묻고 있다. “보기 흉한 것, 불쾌한 것을 업이라고 한다면, 늙음과 죽음은 과보가 아니다.”라고 답한다. 늙음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붓다도 늙음과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임을 몸소 체험하고 세월이 흘러감에 무상함을 느낀다. 늙음과 죽음은 어떠한 업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죄를 지어서 겪는 상황으로 인식되었던 사람들에게 “늙음과 죽음이 과보가 아니다”라는 말은 큰 위안이 된다.

생로병사에 대한 화두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에피소드는 붓다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그가 출가한 동기들이기도 하지만, 그 중에 늙음과 죽음에 대한 충격은 컸다. 디가-니까야(Dīgha-Nikāya)의 대-비유경(Mahā-padāna-sutta)에서, 석가모니 붓다의 19번째 과거붓다인 비바시불(毗婆尸佛, Pali: Vipssin)에서도 비슷한 스토리가 있다. 그는 일체의 감각적 쾌락을 왕자의 가격으로 취한다. 그는 “청련, 홍련, 백련처럼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추위, 더위, 풀, 먼지, 이슬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업의 성숙, 즉 과보에 의해서 “부드럽고 아름답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소유했으며, 그를 보살펴주는 여자들은 우유를 먹여주고, 목욕시키고, 업어주고, 팔로 안아주었다. 겨울추위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궁전, 여름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궁전, 여자들이 악기연주를 들으며 비를 피할 수 있는 우기궁전까지 세 개의 궁전을 소유한다.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화려한 삶 속에서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던 중에 “어깨, 허리, 무릎이 서까래처럼 꺾여 구부러지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비틀거리고 걷는, 초췌하고 젊음이 사라진 늙은 사람을 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았고, 그의 몸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았다.” 비바시불은 처음 이런 사람을 보았다. 함께 있는 마부에게 늙은 사람이란 답변을 듣고서 되묻는다. “늙은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마부는 답한다. “늙은 사람은 이제 오래 살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늙게 되고 늙음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비바시불은 마부의 대답을 듣고 늙음에 관해 생각하니 고통스러웠다. “태어난 자에게 늙음이 시설되다니 참으로 태어남이라는 것이 혐오스럽구나!”라고 통렬하게 비탄한다.(이하 <디가니까야> 참조)

불교에서 늙음과 죽음은, 삶 속에 다른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 즉, 하나의 현상에서 다른 현상으로의 변화함이다. 늙음도 과정이고 곧 닥칠 죽음도 과정이다. 무상함은 모든 것에 적용된다. “죽음은 확실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 늙음의 시간은 인간 탄생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쌓아가야만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젊음이란 찰나지만 늙음이란 그 젊었을 순간의 찰나를 기억하고 저장한다. 그리고 다시 유용하게 쓰는 시간이다. 과거 전생불인 비바시불도, 열반을 앞 둔 현생의 붓다도 늙음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늙음 앞에서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늙음의 미학이 아닐까. 그 흔들림으로 인해 겸허함을 아쉬움을 접하고, 소중한 것들에 대한 최대치가 무엇인지 직감하지 않았을까. 늙음을 이야기하는 방식들에서 차이를 느껴보자. 늙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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