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마이코(峯真依子) 츄오가쿠인대학(中央學院大學) 조교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늙음’이라는 말을 듣고 많은 일본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1957년에 후카자와 시치로(深澤七郞)가 쓴 소설 <나라야마부시고(楢山節考)>(영화는 1983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가 아닐까 싶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이 작품은 일본의 어느 벽지에 있는 오래되고 가난한 농촌에서 마을사람들이 한정된 식량으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노인들을 희생시킨 일을 그리고 있다. 노인은 70세가 되면 ‘시대노야마(죽음으로 떠나는 산)’라고 불린 산 위쪽까지 장남이 등에 업고 가다가 거기에 버려진다는 줄거리이다. 가난함과 낡은 인습에 의해 때로는 노인이 자진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모습은 현실과 괴리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웃을 수 없는 블랙조크가 되고 말았다.

65세로 정년퇴임하면 ‘나라야마(楢山)’로 가야 되는가? 이러한 절망적인 기분이 될 정도로 고령자에 대한 연금은 불충분하다. 게다가 정년퇴임한 후 다시 취직하는 것은 쉽지 않고 저금의 금리도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곁으로 보면서 내가 노인이라면 틀림없이 장난치지 말라는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다. 고령자는 의식하지 않는 채 타격을 입고 있다. 그러나 고령자의 문제는 고령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일본의 출생률 저하는 노인의 인구 증가와 연동하면서 근로자 인구의 비율을 감소시키고, 노인 1명을 지탱하는 근로자(20~64세) 수가 2025년에는 3명을 밑돈다. 노령연금을 비롯한 노인복지 시설과 복지 관련 비용은 원래 근로자의 세금에서 지불되지만, 지금의 근로자가 노인이 될 때에 받을 대가가 앞으로 적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지탱하는 측의 뇌리에 “고령자는 나라야마로”라는 말이 스쳐 지나갈 지도 모른다.

사상가 요시모트 타카아키(吉本隆明)는 “인간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노인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적어도 돌봐주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잉태한 여성에게 충분한 휴가와 급료를 주고 충분히 육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실현되면 역사는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역사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이라고도 바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노인과 임신부(그리고 그 아이)가 모든 불안에서 해방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로 고도한 문명을 이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신념으로 일관된 정책을 가진 정치인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노인상의 변화를 반영해서인지 최근 들어 이 <나라야마부시고>에 <덴데라>라는 제목의 속편이 만들어졌다. 산에 버려진 할머니들은 ‘덴데라’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을 몰래 형성하고 마을에 대한 복수를 도모한다. 거기에는 더 이상 노인의 자기희생은 없다. 노인들은 똑똑해지고 강해지면서 자기 마을이 노인을 버리는 악습(惡習)을 가지게 된 이유가 식료의 재분배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냉철하게 분석한다. 혹자에 의하면 영화의 제목인 ‘덴데라’는 일본어 사투리로 “나오려고 해도 나올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과연 할머니들은 야생 곰에게 몇 번이나 습격을 당한다. 할머니들은 마을에도 돌아갈 수 없고 곰에게 습격을 당하고 눈이 쌓인 ‘덴데라’마을에서 어디에도 나갈 수 없는 사방팔방이 막힌 상태이다. 즉 그것은 오늘날 일본 노인들의 갈 곳이 없는 상황 그대로이며 고령자를 둘러싼 여러 가지 정책이 사방팔방 가로막힌 것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다.

<덴데라>의 등장인물은 할머니뿐이다. 대사 구석구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녀들은 가부장제(家父長制)를 미워하는 여자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고령사회에서는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현재의 7년에서 2050년에는 8년 길어진다고 한다. 여자들이 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보다 고된 싸움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의 은유(隱喩)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감독의 영화에는 배우 류 치슈(笠智衆)가 나와서 마당을 바라보면서 차를 마시고 지난날을 회상하는 노인이 그려졌으나 지금으로는 영화에도 현실에도 어디에도 그런 노인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수명 100세시대로 불릴 만큼 노인의 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인이 오즈 영화의 노인처럼 한가롭게 은거생활에 들어가 버린다면 노후의 자금이 부족해지고 마침내 굶주리게 될 것이다. 성별과 개인의 차이는 있더라도 결국 누구나 평균수명이 길어진 것에 대해 당황하고 있다.

막대한 재산이 있다거나 한평생에 걸쳐 솜씨를 닦는 스시 장인과 같은 직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대부분의 고령자에는 갈 곳도 없고, 롤 모델도 없다. ‘치매’와 같은 노화현상을 ‘노인력을 얻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친 <노인력(老人力)>이라는 책이 1998년에 크게 히트를 친 뒤, 지금도 행복하게 늙기 위한 계몽적인 책은 계속 늘어나고, 누구나 하나같이 대답을 찾고 있다. 고령자에게 돈을 절약하는 방법부터 젊은이를 싫증나게 만들지 않는 행동, 가령취(加齡臭) 대책의 조언까지 다양하다. 과연 독자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려 하고 있는지, 속박시키려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인생의 최종 극면에서조차 이것저것 삶의 태도에 대해 지시를 받고, 남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사는 고령자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이들은 더욱 나이드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물론 늙음이 동경과 희망이 되는 삶의 방식이 나타날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나이가 들었다는 실감이 전혀 없고 그것은 단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고령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마 75세 때였다. 그가 새로운 땅으로 옮기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놀랄만한 일이다. 물론 오늘날의 고령자도 아브라함과 같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에 나이는 상관없다. 내 주변에 있는 고령자들도 씩씩하다. 도쿄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에 도쿄YWCA가 운영하는 여성 전용의 수영장 및 짐이 있는데 1929년에 개관된 당시 봉건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살던 여성들이 자기들을 위해 건강을 생각할 수 있는 선구적인 일본 최초의 여성전용 실내 온수수영장이었다. 16세부터 80세를 넘은 각 연대의 여성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거기에 다니는 고령 여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그녀들이 늙고 죽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조건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몸이 죽을 때까지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속담에 “여자는(죽고 화장되어서) 재가 될 때까지”라는 말이 있지만, 지금 일본 사회에서 고령여성의 성에 관한 화제는 기본적으로 금기시된다. 하지만 늙음을 자기결정하려는 고령자가 앞으로 늘어나게 되면 그것에 따라 고령자가 성 이야기도 변화될 것이다. 여배우이자 작가의 기시 게이코(岸惠子)는 최근에 <어쩔 수 없는 연애(わりなき戀)>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70세 여성의 성과 사랑을 매우 구체적으로(호르몬치료의 상세한 모습을 포함해서) 묘사하고 화제가 되었다. 성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적으로 고령자의 이미지를 깨는 작품과 삶은 점점 다양해질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된 라는 사진집을 보면 피사체는 60-100세의 뉴욕 여성들이고 그녀들의 개성에 뒷받침된 아름답고 건강한 늙음은 충분히 젊은이들의 관심도 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인생의 맨 마지막까지 반짝거리고 있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짐이나 수영장에서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 사랑도 하고 좋아하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동안은 그나마 좋다. 하지만 노화가 심해지고 눈이 어두워져서 배설도 잘 되지 않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야말로 우리 지혜가 시험받게 된다. 여기서 나의 결론은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반복되지만 우리 문명은 노인에게 안정을 줄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고도한 앎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늙음의 의미가 바뀌어야 된다. 즉 신체능력이 바닥나고 완전히 늙었을 때에 그 늙음이 전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의미가 생길 필요가 있다.

철학자 와시다 세이이치(鷲田淸一)는 늙음에 대해 흥미로운 말을 했다. “노력한 뒤의 휴식도 퇴역했기 때문에 얻어지는 편안함이 아니라, 해야 된다고 여겨져 온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과 연결되는 하나의 초절(超絶)로써 ‘늙음’에 잠길 수 없을까?” 과연 우리는 어찌됐든 마지막에는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일이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움직이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한 경험을 통해 원래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고령자가 사회에 제시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젊은 사람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조금뿐이니 그런 쓸데없는 일은 안 해도 돼”라고 그들이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인가. 늙음에는 인간이 사는 의미와 인생의 질을 높여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류 전체의 이익이다. 또한 늙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노인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것과 연결된다.

노인을 그린 미국영화로 ‘8월의 고래’가 있다. 나이든 자매가 어느 섬의 해변 집에 살고 있다. 누나는 백내장으로 눈이 안 보이고, 늙은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나날을 산다. 섬에는 매년 8월에 고래가 온다. 영화 마지막에 두 사람은 마음을 먹고 섬의 곶까지 고래를 보러 간다. 그녀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고 서로가 서로를 지팡이처럼 받쳐주면서 걸어간다. 곶에 다다르자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동생이 “고래는 가 버렸어요.”라고 안타깝게 말한다. 그러자 눈이 안 보이는 누나가 “어떻게 알아? 그것은 모르는 일이에요.”라고 말하면서 둘이서 가만히 고래를 기다린다. 여기서도 여러 가지 일을 못하게 된 그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의외로 우리가 해야 된다고 믿어온 것들은 기실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닷가에서 고래를 기다리는 것이라거나 그러한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