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대장간의 우리문화 원형속으로

 
 
증평대장간 최용진 장인. 상처가 깊어야 풍경이 깃든다.
증평대장간 최용진 장인. 상처가 깊어야 풍경이 깃든다.

 

 어떤 길은 구부러지고 어떤 길은 곧게 뻗어있다. 어떤 길은 발 닿는 매 순간 보드랍고 어떤 길은 걸을 때마다 천근만근이다. 어떤 길은 숲과 계곡과 꽃으로 가득하고 어떤 길은 삭막하고 북풍한설 몰아친다.

어떤 길은 유순하고 어떤 길은 험하고 고달프며 마른 먼지 푸석인다. 산길, 들길, 물길, 골목길, 기찻길, 하늘길, 아스파트길…. 혼자 걷기도 하고 둘이 걷기도 하며 여럿이 함께 걷기도 한다. 길을 걷다가 두리번 거린다. 풍경을 담고 추억을 담고 그리움을 담는다. 꿈을 담고 사랑을 담고 상처를 담는다.

길을 걷는 매순간이 삶의 신비다. 길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고 머뭇거리기도 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오늘도 내가 걷는 길 위에 내 삶의 무늬가 찍힌다. 누군가의 무늬를 밟고 누군가는 내 삶의 무늬를 밟는다. 길을 걸을 때마다 가슴이 뛴다.

전통시장을 걸을 때는 설렘과 흥겨움이 있다. 남루한 풍경에 깃든 삶의 이야기가 정겹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고단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달려온 우리의 이웃을 만날 수 있다. 수백 개의 좌판이 도열해 있고 사려는 자와 팔려는 자의 은밀한 거래의 미학이 있다. 먹거리 볼거리 추억거리 살거리…. 말 그대로 삶과 문화와 희망이 가득한 곳이다.

증평 장뜰시장이 그러하다. 새벽 안내가 짙게 깔린 그날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먼지 푸석이는 버스에서 보따리를 든 할머니가 내리고 무와 배추, 고구마와 사과, 인삼과 건고추를 가득 실은 경운기가 장터 입구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글자글 주름 가득한 촌로가 경운기에 실려 있는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어느 새 장터 골목은 잔칫상 푸짐하고 충청도의 구수한 입담으로 소란스럽다.

가을곡식은 물론이고 산나물 들나물 민물고기 할 것 없이 내륙의 보배들은 제 다 모였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비릿한 내음의 생선들도 도열해 있다. 새벽부터 전집이 문전성시다. 들기름에 튀겨져 나온 노릇노릇한 전들이 길 위의 나그네를 유혹한다. 그 황홀한 맛의 세계에 빠져든다. 이곳엔 유독 순대집이 많다. 순대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잔이면 족하다. 진한 육수로 허기진 배를 채워도 된다.

장뜰시장의 백미는 방앗간과 떡집, 그리고 대장간이다. 방앗간과 떡집은 가을에 제철이다. 기름을 짜고 고추를 빻고 콩을 볶고 떡을 찌는 일들이 쉬지 않고 반복된다. 예전에는 절구와 맷돌이 방앗간 역할을 했다. 절구나 맷돌은 공격성과 창조성을 함께 지녔다. 빻고 으깨고 가루를 만드는 행위가 공격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을 활용해 다양한 식문화를 만드니 위대한 창조성이 아니던가.

기름을 짤 때면 고소한 그 향과 맛이 온 몸으로 스며든다. 낡고 허름한 방앗간은 온통 들기름, 참기름 냄새로 요동친다. 팥 가득 들어간 고사떡이나 호박떡을 찔 때는 침샘이 용솟음친다. 뜨거운 김이 피어나고 달달한 맛이 코끝을 스치는가 싶더니 뱃속에서는 꼬르륵 거린다. 거칠고 단단한 기계 속에서 불의 기운과 만나더니 신비의 생명이 잉태한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고 했다.

대장장이 최용진 씨는 이곳에서 40여년을 쇠와 불을 벗 삼아 달려왔다.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고 했던가. 최고의 연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과 모루와 시간의 견딤이 필요하다. 야장의 망치질이 요란할수록 훌륭한 연장이 탄생된다. 수많은 담금질과 매질 속에서 차갑고 단단한 철은 생활의 도구가 된다. 때로는 전장의 무기가 되기도 하고 예술의 옷을 입기도 한다. 숙련된 야장의 풀무질과 진한 땀방울로 탄생한 연장은 고귀하다.

장뜰시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창고건물을 리모델링한 커피숍도 옛 추억에 젖게 한다. 바로 그 옆 골목에 있는 목재문화체험공방은 장기영 작가가 느티나무의 결과 향을 담아 천년 가는 생활가구를 만들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여유를 갖고 한갓지게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면 이처럼 신묘함이 쏟아진다.

전통시장은 잊혀져가고 사라져가는 옛 추억을 되돌려 준다. 어릴 적 그 풍경 속으로의 여행이며 존재의 이유와 삶의 여백을 만들어 준다. 생명의 개별성은 슬프지만 소중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개별성과 살아야 하는 이유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 그래서 이곳은 오래된 미래다.

시장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빚는다.
시장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빚는다.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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