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중원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수

 

한때 국회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정치에 뜻을 둔 욕망의 직업은 아니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한 제도권 내, 안정적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 잇속을 차릴 일에 언제나 쭈뼛거렸고 응당 갖춰야 될 정무적 감각보다는 시답잖은 평론가적 입장을 견지하기 일쑤였다. 난 애당초 정치를 하기에는 그릇도 깜냥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회운동을 오래 해서인지 제법 비린내 나는 정의감에 사로잡혔고 겉과 속이 다른 렉토릭이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행보는 내겐 지독히도 버거운 풍경이었다. 국회에서 밥벌이를 하는 동안 어느 해 국정감사에서는 여당 의원의 보좌관인데도 고속도로 하이패스 통행 기록을 영장 없이 사정기관에 제공하는 도로공사의 반인권적 행태에 절망했고 매년 적자에 허덕이는 철도공사의 KTX 할인권 남발에 분노했다. 국감 질의를 앞두고 문전성시를 이룬 피감 기관 대관 담당자들의 뻗치기식 질의서 사전 유출 로비에도 영 내키지 않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응수하기 일쑤였다. 치기 어린 무용담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눈치챘겠지만 한때 내부자였던 나의, 국감 민낯을 들춰보고자 꺼내든 말이다.



매년 10월이면 여의도는 백야를 보낸다. 불이 꺼지지 않는 의원회관은 수능을 앞둔 고3 교실이 된다. 의원실의 한 해 성적을 가름하는 국정감사 기간이다. 민원을 들고 오는 민원인들은 물론이고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이들과 소위 이야기가 되는 기사꺼리를 찾는 기자들로 의원회관은 북적인다. 국정감사는 체감되는 민생정치의 현장이다. 그러나 국감은 행정부의 부재된 정책을 필연적 의제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흔히 관심을 두는 국회의원의 이벤트성 개인기에 언론은 주목하고 의원들의 자질은 밑바닥이 드러나면서 해마다 국감 무용론은 늘 대두된다.



국감은 군사정권 때 폐지되었다가 지난 13대 국회에서 부활되었다. 특정 기간 동안 국가기관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감사를 하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국감은 지난해의 정책과 예산을 감사함으로써 내년도 예산 심의와 정책 집행의 토대를 삼기 위한 제도다. 정책국감과 예산국감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선언적 가치이다. 매년 국감은 정책감사가 아닌 정치 감사로 진행된다. 야당은 한탕주의로, 여당은 정부 변호에 급급하다. 게다가 여야를 막론하고 막말과 고성, 호통치기 등의 행태는 늘 전투적이다. 올해에도 그 피감기관에 대한 갑 질과 호전성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국감을 대체할 행정부 견제장치는 딱히 없다.



유권자의 관심을 먹고 사는 의원들에게 국감만큼 한껏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는 없다. 당 지도부에 어필하고 시민단체가 주는 국감 우수의원 상이라도 받을라치면 확실한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한다. 정당에선 국감 성적을 차기 총선 공천에 반영하기도 한다. 의원의 정치적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정책적 대안 자료보다는 자극적이고 폭로성 자료가 선호된다. 언론도 이에 적극 부응하니 양수겸장이다. 그러니 이 시기 보좌진은 단독 한방을 노리는 기자들과 동맹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소위 쌈빡한 한 건이 나오지 않으면 보좌진은 생계가 불안해지고 말진이라 불리는 기자들은 초조해진다. 국정감사가 끝나면 국회 보좌진 채용시장은 어김없이 열린다. 기이하다. 의원의 자질보다 보좌진의 자질을 우선시하는 풍토가 한국 정치의 현주소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국감의 주전 선수인 의원 본인의 능력과 투혼이 선행돼야 함에도 코치 탓만 해대는 꼴이다. 보좌진이 밤새워 쓴 질의서를 국감 당일 아침 받아들고 국감장에 들어가 시종 호통만 치다 나오는 의원에게서 공익적 효과를 기대하기란 난망하다. 물론 보좌진들과 소통하며 제대로 된 질의를 채비하는 의원도 있다. 그 수가 많지 않을 따름이다. 더군다나 그런 선량들은 다음 선거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힘겹다. 정치지형의 한계이다. 이를 입증할 사례는 태산이다. 독자들에게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국회는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공간이다. 단언컨대, 관료제 하의 행정부는 그릇된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의사가 크지 않다. 이는 오로지 국회의 역할이다. 국정감사는 정치 선진화의 바로미터이다. 마땅히 국회가 해야 할 품격 있는 민생정치의 진수를 국감장에서 찾는 것은 올해에도 여전히 난망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인가, 제도인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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