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시인

 

 

11월은 무슨 달일까. 11월은 딸부자 집 ‘말년이(末女)’나 ‘끝순이’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달이다. 5월은 가정의 달과 같이 달리 불리는 이름도 없고 8월 15일 광복절 같은 굵직한 국경일도 없는 달이다.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던/황량한 가을바람이 몰아치며/모든 걸 다 거두어가는//

11월에는/외롭지 않은 사람도/괜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입니다“. 이임영의 ‘11월의 시’처럼 딱 그런 달이다. 불붙듯 화려한 단풍을 즐기다가도 문득 노을 지는 모습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달이 11월이다. 왠지 ‘11월’이라는 이름마저도 짠하게 느껴지는 달이다.

그러나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그 나름의 성취와 희로애락이 있듯이, 11월에 속해있는 하루하루의 면면을 살펴보면 11월만큼 괜찮은 달도 없다.

우선 첫날이 ‘詩의 날’이다. 이 보다 멋진 시작이 있을까. ‘시의 날’에 대한 유래는 따로 있지만 온 산을 붉게 물들이며 혼절하듯 타오르는 늦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11월의 첫날을 ‘시의 날’로 정한 것은 맞다.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고 지난 7일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입동(立冬)’였다. 11월 9일은 ‘119’로 소방의 날이며, 11월 11일은 기념하는 주체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젊은 층에서는 ‘빼빼로데이’라 하여 막대과자를 주고받고, 한편에서는 쌀 소비를 위한 ‘가래떡 데이’로 ‘농업인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 청주시는 동아시아생명문화도시 선정을 기념하여 2015년에 11월11일을 ‘젓가락데이’로 정하고 한.중.일 삼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축제로 ‘젓가락페스티벌’을 개최해오고 있다.

11월 14일은 무비데이다. ‘연인들끼리 영화를 보면서 즐기는 날’이라는 의미다. 관련업계에서는 2월 14일을 ‘화이트데이’, 3월 14일을 ‘발렌타인데이’라는 대표선수 격 기념일을 앞세워 매월 14일에 어떤 의미라도 붙여 소비를 촉진시키자는 전략적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 11월 22일은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다. 11월 25일은 ‘추수감사절’이고 11월 30일은 ‘무역의 날’이니 11월에 대해 따로 부르는 이름은 없어도 바쁘게 살아가는 값진 일상이 여느 달 못지않게 꽉 차 있는 달이다.



11월에 붙여주고 싶은 별칭이 있긴 하다. 바로 ‘위령(慰靈)의 달’이다.

“세상은 저물어/길을 지운다//나무들 한 겹씩/마음을 비우고/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독약 같은 사랑도/문을 닫는다//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바람도 어디로 가자고/내 등을 떠미는가//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서쪽 하늘에 걸려/젖은 별빛으로/흔들리는 11월”. 이외수 소설가의 ‘11월의 시’ 전문이다. 11월은 유독 ‘비우고 내려놓고 떠난다’는 감상이 한 달 내내 가슴에 머무르는 달이다.

아마도 화려했던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지는 자연의 순리 앞에 짧은 인생여정의 허전함이 겹쳐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난 13일, KBS 시사기획 ‘창’이란 프로그램에서 ‘돌아오지 못한 독립투사들’이 방영됐다.

충북진천을 고향으로 둔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작가요, 교육자며, 시인으로 근.현대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인 포석 조명희 선생도 연해주 ‘항일투쟁영웅 59인’에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묘소의 위치마저 확인되고 있지 않는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한다.

11월에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모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의 달’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다.

이해인 수녀의 ‘11월의 나무처럼’에서 ‘위령의 달’ 11월을 보내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사랑이 너무 많아도/사랑이 너무 적어도/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중략)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갈 길을 가야겠어요“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