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 추성산성 풍경
증평 추성산성 풍경

가을의 완성은 홍시다. 북풍한설을 비집고 새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꽃이 피고 녹음 가득하더니 그토록 잔인했던 여름과 메마른 대지와 악마처럼 들이닥친 태풍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나 알알이 열매 가득했다.

저 안에 기쁨과 영광, 미련과 슬픔의 무수한 풍경이, 깊은 상처가 깃들어 있다. 골목길에서, 신작로에서, 들녘에서 하늘을 나는 새와 길목에서 어슬렁거리는 짐승과 정처없는 나그네의 이야기를 제 다 품었다. 가끔은 바람이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깜짝 놀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까치밥이 되기도 했다.

살아남은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이 모든 것들을 겪고 품었으니 인생의 쓴맛조차도 달달한 과즙으로 그 속을 꽉 채었다. 오동통 살 찐 너는 가을볕에 붉게 빛난다. 저것들을 광주리에 가득 담아가고 싶다. 기나긴 겨울의 간식이다. 옛 생각 그리울 때 하나씩 입에 물고 달달한 추억여행이라고 하고 싶다.

증평군 도안면 연부자 마을로 들어서자마다 만추의 풍경이 쓸쓸했다. 꽃도 지고 낙엽도 진 마른 가지에 붉은 홍시만 길 위의 나그네를 반긴다. 연부자 마을은 말 그대로 전국에서 연씨(延氏)가 가장 많이 사는 마을이다. 곡산 연씨는 본향이 북한 황해도의 곡산이다. 남한에서는 도안면이 본향과 다름없다 보니 ‘도안 연씨’로 통하기도 한다.
곡산 연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고려 말 요동정벌 때 이성계를 도운 공으로 조선 개국과 함께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고 2차 왕자의 난 때는 정안대군 이방원(태종)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에 책록된 곡산부원군 연사종(1360~1434)의 증손인 사직공파 연정(延侹·1486~1549)이 안동 김씨와 결혼하면서 처가인 도안으로 이주하면서다. 임진왜란 때 청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의병장 연충수(1545~1621) 안음현감,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애국지사 연병환·병호 선생 등이 도안 출신이다

이후 만석지기 부자인 연서조가 흉년 때마다 이 일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선행을 베풀었으며, 이 때문에 이 고을의 많은 부자들이 선행을 실천하면서 연부자 마을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 마을에는 선바위, 울어바위, 우물터 등 곳곳에 옛 이야기가 가득하다. 산길 들길 마을길을 걸으면서 풍경에 젖고 이야기에 젖고 추억에 젖는다.
울어바위 이야기가 왠지 궁금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을 지나던 어느 대사가 마을 동남쪽 안산 아래에 있는 넓고 큰 바위를 보고 신령한 바위라 하여 ‘鳴巖’이란 글자를 새기고 국가의 대란이 있을 때 이 바위가 울 것이라 예언한 뒤로 마을의 이름을 울어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위가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하며 당시 안음현감 연충수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마을 뒷산에 국가사적 제527호 추성산성이 있다. 4~5세기 백제시대 흙으로 쌓은 산성으로는 도성 이외의 지방에 존재하는 최대 규모의 성곽이다. 내성과 외성의 중첩구조로 남성, 북성이 배치된 구조는 추성산성만의 특징이다. 남문지는 계곡부 뒷산에 위치해 타 지역의 문지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북문지는 바닥을 단단하게 다진 후 그 위에 부정형 석재를 이용해 측벽과 바닥석을 조성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이곳에 성을 쌓았을까. 유목민들이 산으로 들로 강으로 떠돌다가 산과 물과 볕과 비옥한 땅이 좋은 이곳에 정착했을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사랑하며 살았으리라. 마을 앞을 지나는 하천이 보강천이다. 역사를 담고 자연을 품은 물살은 증평 사람들의 마음에 부려놓는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할 곳이 있다. 앞 마을의 필장 유필무씨를 만나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붓과 인연을 맺었다.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에게 붓을 만드는 일은 평생의 업이자 운명이다. 태모필, 황모필, 양모필, 초필…. 그의 손을 거치면 운명을 다한 그 무엇도 붓 한 자루의 새 생명을 얻는다. 붓 한 자루를 만들려면 손으로 만 오천 번을 두드려야 붓의 총이 만들어진다. 장인의 진한 땀방울과 열정과 손끝의 예지가 끼쳐온다.

한 일(一)자를 10년 쓰면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했다. 지금 내 삶에 강물이 흐르고 있는가. 붓으로 말하고 붓으로 노래하고 붓으로 인고의 세월을 지켜왔으니 예술은 언제나 위대하다. 정직하다.  매주 금요일 게재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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