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교육제도의 개정의 기초 작업

●교육조사위원회의 설립

▷야마가미 “지방제도를 개정한데 이어, 교육제도를 개정함에 있어서도 당국의 여러분들은 말할 수 없는 고심을 하셨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점에 대해 당시의 추억담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마츠무라 “1919년에 있었던 독립운동 직후, 헌병경찰에서 보통경찰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에 저는 후쿠오카(福岡)현 이사관에서 전라북도 제 3부장으로 전임임명을 받았습니다. 치안유지 및 민심안정의 제 1선에 서서 조선 경찰행정이 가장 다사다난했던 가을에 부임해 약 1년 반 동안 도저히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 후 1921년 2월 철도부장으로 승진한 유케코타로(弓削幸太郞)씨의 뒤를 이어 총독부 학무과장 직에 취임을 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조선교육의 기초 작업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귀한 추억이 됐습니다. 당시 학무국장으로 발령을 받았던 시바다씨의 취임 이후에 일어났던 흥미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통치 비화의 금상첨화격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 또한 그 때 경험했던 일들을 저의 좁은 견문에 기초해 당시의 추억담 삼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주대전(歐洲大戰 : 1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대세와 급박한 조선 실정에 비추어 조선통치에 근본적 쇄신을 결행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및 통치 수뇌부의 방침이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당면한 급무인 치안유지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산업·지방제도·교통·사법·위생·사회구제 등의 제반 문화적 시설들을 일신하겠다는 대단한 의지로 개혁의 발걸음을 내딛게 됐습니다.

특히 교육제도의 개정 및 교육시설의 충실은 소위 일시동인·내선(一視同仁 ·內鮮)무차별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더 긴급하고 근본적으로 필요한 임무였기 때문에 우선 응급조치로서 보통학교 및 각종 학교의 증설 확장을 꾀하는데 주력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20년 11월에는 조선교육령에 개정을 가해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연장했고, 고등보통학교에 보습(補習科)제도를 시급히 설치해 보통 교육의 내용에 충실을 기하고 일본 교육기관과의 원활한 연락이 가능하게 개정했습니다.

조선 교육은 통치 정책 상 지극히 중대한 정책의 하나인 만큼 신중한 고려를 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먼저 임시 교육 조사위원회를 설치한 후, 일본과 조선 교육계의 선배들을 위원으로 위촉해 조선교육령의 개선 및 기타 교육 상 중요한 안건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종전의 조선인 교육제도는 일제의 강점 직후에 제정됐던 것으로 일제의 강점 당시의 실정에 맞추어 학교의 계통을 간단히 했고 수업연한을 단축했으며 교과과정은 필수·실용의 두 가지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10년 동안 민지민도(民智民度)가 현저하게 향상됐고, 민중의 향학심도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선교육령의 근본적 개정이 절실히 요구됐던 만큼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개정을 단행하고, 문화 촉진에 힘을 기울여 일시동인의 성지(聖旨)를 실현하기 위해 기초적 작업에 들어가게 됐던 것입니다. 즉 1921년 1월 7일과 동년 5월2일의 2회에 걸쳐 임시교육 조사위원회를 열어 학무국의 원안에 따라 신중한 심의를 하게 됐던 것입니다.”



●교과서 조사위원회

▷마츠무라 “교육제도 혁신과 더불어 교과서 개선이 시급히 요구됐기 때문에 교과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 일본과 조선을 막론하고 학식에 경험 있는 전문가를 위원으로 위촉한 후, 교과서에 관한 학무국의 심의 안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회의는 1회 교육조사회 직후 즉 1921년 1월 12일에 있었는데 개정 교육제도의 구체적인 성안(成案)은 아직 발표할 시기가 아니었던 관계로 전년도 안에 대한 부분적 개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무국의 복안을 전제로 교과용 교재의 조직 및 내용을 입안, 조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의 교육제도는 일단 기본 방침으로서 일본 교육제도에 준거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교과서도 양자 공통점이 많을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풍속, 습관, 언어, 기타 각종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교과용 도서를 편찬하는데 있어서도 미묘하고도 곤란한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일제 강점 후 계속해서 도서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미 상당한 연수가 경과한 관계로 시대에 뒤떨어질 뿐만 아니라 교수의 현지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부족한 점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제도를 혁신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교과용 도서의 개정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위원회에 제출해야할 심의 안을 만드는데 있어서 남모르는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득방가백세기(策得邦家百歲基)

▷마츠무라 “교육조사회의 회답에 기초해 미츠모토(三本) 두 법제국 참사관의 협력을 얻어 교육령 개정안을 작성한 후 이를 즉시 내각으로 보내게 됐습니다. 시바다 학무국장인 다나카 시학관(視學官) 등이 이를 설명할 임무를 맡았고 우리들은 교육제도 개정상 필요한 부령(府令)을 입안하는데 착수했습니다. 또한 령(令)에 의해 교육시설 10개년 계획안을 짜게 됐는데, 교육시설에 관해서는 1919년 관제개정 직후, 보통학교를 6면에 1교씩을 세우기로 한 기준 방침을 바꾸어서 3면에 1교씩 세우는 것으로 개정한 바 있으나, 시정의 혁신에 따라 향학심이 현저히 높아 졌기 때문에, 1면 1교 지침으로의 개정이나 전면적인 의무교육 제도로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식의 열열한 요망이 있어 당국으로서는 이를 억누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로서 미화한 후 시설을 갖추지 않는다면 결국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재정과 민력을 감안해 시설의 적의를 꾀하고 점진적 추진을 해갈 방침을 취했던 것입니다.

경무 당국의 시책이 점점 효과를 거두어 조선 내에 평정을 회복하게 되자 통치의 중심은 자연히 교육 산업분야로 이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921년 9월 29일 미즈노 정무총감이 교육 조사회·산업 조사회에 관계했던 관리·관료들을 위해 위로회를 개최했을 때 특히 이러한 사실을 깊이 느꼈습니다. 당시 총감은 조선통치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해하시면서 앞으로도 국가의 대 과제인 안정된 통치를 위해 더욱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해 줄 것을 희망하셨습니다. 니시무라(西村) 식산국장이 일동을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올렸고, 더욱이 국가를 위해 분골쇄신할 것을 맹세했는데, 나의 20년간에 걸친 관리생활을 뒤돌아볼 때 이처럼 진정한 감격에 넘치는 장면을 대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석상에서 향당 총감(香當: 미즈노 총감의 다른 이름)이 발표하신 두 수의 시는 주객의 심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不求功利不求名 불구공리불구명

蹇蹇匪躬唯至誠 건건비궁유지성

此酒夜南山山下會 차주야남산산하회

酒間把臂話心情 주간파비화심정

不管世間論是非 불관세간논시비

人生百事萬難期 인생백사만난기

欲敎皇化洽新域 욕교황화흡신역

策得邦家百歲基 책득방가백세기



●활기 넘치는 조선 교육계

▷야마가미 “1921년 11월에 소집된 관립 학교장, 고등여학교장, 실업학교장 등의 회의에서 미즈노정무총감이 ‘조선통치의 근본방침을 문화정책에 두고 있는 오늘날 자연히 통치 비중을 교육사업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한 때 동요하던 민심도 지금은 다소 평온을 회복했고, 향학심이 고도로 불타오르는 최근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제반 교육상의 시설을 갖추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할 때가 드디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요 후 다난했던 상황으로 인해 조선인 교육이 다소 의기소침했던 것을 지적하시며 교육시설을 촉구하심으로써 교육계에 강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희망의 거화를 지펴 주셨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학무국은 계획에, 입안에, 시설에 더욱더 분주해지기 시작했고, 국장에서 고용원에 이르기까지 일심동체가 되어 열심히 일했습니다.

개정교육령에 대한 추밀원 특별위원회에서의 심의가 연내에 일단락을 고하자, 다음해인 1922년 정월 다시 서둘러 교육개정에 따른 관제 교육법규(거의 전반에 걸친 30여건의 제 규정)에 대한 개정 및 제정에 착수했습니다. 임시 안은 지난 여름부터 준비해 왔었지만, 4월 신 학년부터 실시해야 했기 때문에 완전히 배수진을 치고 심의를 강행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새 교육령안은 1월 25일 섭정궁(攝政宮)으로 전하의 태임(台臨 : 섭정후 최초) 하의 추밀원 회의에 상정됐는데, 특별위원장 하마오신(濱尾新)씨가 보고한 그대로가 만장일치로 가결됐다는 전보가 경성에 있는 모리야비서관 앞으로 도착했습니다.

그 날은 마치 내 생일과 똑같은 기분으로, 아내가 해 준 요리를 먹으며 자축연을 가졌고, 다음 날은 학무국 동료들과 함께 음식점에서 축배를 올렸습니다. 동 회의에서 가결된 내용은 2월4일의 관보에 게재됐는데, 글은 악필이나마 제가 썼고, 새 교육령 발표에 즈음한 총독의 유고 및 정무총감 담화도 함께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2월11일 기원절(紀元節 : 일본의 개국기념일. 1872년부터 실시)을 기해 경성 공회당에서 새 조선교육령 발표 기념 대축하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문명통치를 위해 관민 모두 함께 기염을 토했던 것입니다. 당일 일자에 다음과 같이 휘갈겨 쓴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볼 때마다 지금도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일시동인의 성지(聖旨)가 신 교육령으로서 결정을 보게 됐다. 일본과 조선의 동일한 교육제도,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문화운동, 신(神)에 가까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우리들은 큰 대도를 갖추었다.

오너라 조선 동포여!

당신들의 전도는 광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추밀원 본회의에서 고 호즈미 진즈우(穗積陳重) 박사는 ‘교육제도를 개정하고 교육기관을 확장하면 많은 졸업생들이 사회로 배출될 것이다. 그러나 졸업 후 일할 자리가 없게 되면 사회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과연 정부는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라고 질문하였는데, 당시의 수상이었던 다카하시고래기요(高橋是淸)씨는 ‘정부는 이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답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 7월 지방제도를 개정함으로써 지방자치의 서막을 열었고, 이것이 조선인의 정치적 욕구를 궤도에 올려놓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더불어 교육령의 개정은 일시동인, 내선(일본 조선)무차별이 입에 발린 슬로건이 아니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입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앞길에 광명을 비추어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신정(新政)을 신뢰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 교육 당국자의 책임은 배로 증가됐고, 앞으로는 능력 있는 부하를 더 많이 육성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섰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참으로 신정을 이해하고, 제국의 일원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인재를 양성해야할 것이 요구됐습니다. 따라서 공직에 있는 교육자들은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을 가지고 한반도 교육을 혁신할 각오로 매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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