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다리에서 지나온 삶의 풍경에 젖고

 
 

(동양일보) 은빛 호수에서 만추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농다리의 자줏빛 자연석 사이로 물길이 눈부시다.
농다리의 자줏빛 자연석 사이로 물길이 눈부시다.

 

오늘도 길을 나선다. 신작로를 피해 산길을 걷는다. 가을의 끝자락 빛과 그림자 사이로 자연은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육탈의 비명을 지른다. 그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풍경에 바람만 나부끼고 지난날의 추억은 속절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내 곁에 없다.

남은 것은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할지 두리번거리니 내가 가지 않은 길 저 끝에 붉은 깃발이 휘날린다.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길, 자박자박 설렘을 안고 들어가니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들이 가볍게 여겨지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자연은 언제나 머뭇거리는 내게, 욕망의 오벨리스크를 쌓고 있는 내게 무언의 가르침을 준다.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노래, 가장 아름다운 풍경, 가장 소중한 일들은 아직 우리 곁에 오지 않았다고, 그래서 앙가슴 뛰는 마음으로

매순간 기침을 하며 새로운 시선을 던지는 것이라고, 오늘 나는 가지 않은 길을 걷는다. 내가 가는 길이 새 길이다.

길과 길을 연결해주는 것이 다리다. 징검다리, 섶다리, 방축다리, 살래다리…. 한국의 애잔한 삶과 풍경이 가득한 시골의 다리에서부터 최첨단 공법의 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람이 걷고, 자동차가 달리고, 기차가 쏜살같이 질주하는 다리에서부터 사찰의 도량과 아늑한 삶의 미학을 표현하고 있는 다리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기능과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천년의 다리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천년의 숨결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다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며 마음과 마음이 하나되게 하고 자연과 문명, 이승과 저승, 현실과 이상이 만나는 곳이다. 송광사 삼청교는 속세를 떠나 부처의 길을 가려는 결연함과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구도의 세계를 기원하며 걷는 길이다. 곡성 태안사 능파각은 다리이자 금강문이며 누각의 기능까지 하면서 정갈한 마음으로 불국에 이르도록 한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촘촘히 박혀 있는 선암사 승선교는 오가는 사람에게 두 팔을 벌려 품어주는 매력이 있고 불국사의 다리는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는 다리다.

‘천년의 다리’라 불리는 진천 농다리를 건너다보니 어릴 적 시골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논두렁 밭두렁을 오가며 뛰어놀던 추억과 시냇가에서 첨벙첨벙 물장구치던 악동들의 놀이만큼 신나는 게 없었던 것 같다. 돌다리를 건너던 소년은 지금 지천명이지만 돌이켜보면 그간의 삶이 누추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다. 이 길 한 가운데 서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인 농다리는 물고기 비늘처럼, 작은 돌을 촘촘히 쌓아 만들었다. 천년 이상을 단 한 번 유실되지 않고 버티도록 축조한 조상들의 기술력이 실로 놀랍다.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다고 해서 농다리가 부른다. 커다란 지네가 몸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줏빛 자연석을 축대 쌓듯이 안으로 물려가며 쌓았다. 교각의 수가 28개, 길이가 100m에 달한다. 그 사이로 세금천의 빛나는 물살이 온 몸을 비비며 흐른다.

초평호의 초롱길
초평호의 초롱길

농다리를 건너면 왼쪽 농암정으로 이어지는 1.7km의 트레킹 코스가, 직진방향의 언덕길 너머에서는 탁 트인 초평호의 전망이 펼쳐지는 수변탐방로가 시작된다. 이름하여 초롱길이다. 숲과 호수를 사이에 두고 나무데크길, 트레킹길이 예쁘게 만들어졌다. 그 사이에 하늘다리가 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다리를 걷는 기분이 삼삼하다.

초평호는 전국의 낚시꾼들에게 짜릿한 손맛을 선사한다. 호수에 떠 있는 100여개의 좌대가 절경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고기를 낚는 게 아니고 풍경을 낚는다. 고단한 삶을 토해내고 대자연의 정기를 온 몸으로 품는다. 세종대왕이 초정으로 행하던 길에 마셨다는 소습천이 인근에 있다. 살고개 바위에는 장수들과 말 발자국이 있다. 장수들이 농다리를 놓기 위해 말로 돌을 운반하던 흔적이라고 전해진다. 배타고 들어가야 하는 쥐꼬리명당은 말 그대로 쥐꼬리 같다.

이 동네의 진미는 붕어찜이다. 토종 붕어에 시래기와 갖은 양념을 듬뿍 넣어 끓인 붕어찜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구순한 그 맛과 풍경에 젖는다. 천년의 아득한 시간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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