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희/논설위원/소설가/한국선비정신계승회 회장

(동양일보) 이를 하나하나 열거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 만부득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볼까 한다. 먼저 사극에서 왕을 알현하는 장면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임금은 지존(至尊)이므로 그 지존께 정배(正拜)하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뿐이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곡배(曲拜)를 한다. 정배란 임금을 마주 보고 하는 절을 말함이며 곡배란 임금을 마주 보지 않고 동쪽이나 서쪽을 보고 하는 절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임금께 정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누구인가. 왕비와 국본(國本)인 왕세자 단 두 사람뿐이다.

어휘의 장단만 해도 그렇다. 어찌 된 영문인지 길게 장음으로 발음해야할 어휘도 짧게 단음으로만 발음한다. 가령 임금이나 나라의 명을 받고 외국에 사절로 나가는 신하를 ‘사-신’(使臣)이라 하고 이 사신은 길게 ‘사--신으로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신을 모든 방송이나 화자들이 하나처럼 짧게 ’사신‘이라 발음하니 이게 사신(私信)인지 사신(私臣)인지 사신(邪神)인지 사신(詐臣)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사기가 나쁜 마음으로 남을 속이는 사기(詐欺)인지 사기 그릇 사기(沙器)인지 사사로운 기록 사기(私記)인지 요사스럽고 나쁜기운 사기(邪氣)인지 알 수가 없다. 과인(寡人)만 해도 그렇다.

과인이란 덕이 적은 사람이란 뜻으로, 임금이 자신을 낮춰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로 길게 ‘과-인’으로 발음해야 함에도 모든 사람들이 짧게 과인 과인 한다. 이는 극본을 쓰는 극작가가 공부를 해 출연진들에게 알려주면 이런 부끄러운 오류는 없을 것이다. 아니다. 극본 쓰는 이, 출연하는 이, 연출보는 이들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이 사실을 알거나 부끄럽게 여겨 언어의 고저 장단 강약 경중을 바로 사용하기 운동이라도 전개한다면 이런 창피막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 여기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문제 삼지 않으니 낭패인 것이다. 방송사가 제구실을 하려면, 그리고 드라마를 제대로 만드려면 기본이 되는 어휘부터 제대로 구사해야 함에도 이 기본이 엉망이니 낯 뜨거워 볼 수가 없다. 연기들이야 좀 잘하는가. 잘 하는 연기만큼 어휘 구사도 제대로 하면 금상첨화일텐데 그렇지를 못하니 딱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아나운서는 어휘의 고저 장단 강약 경중을 정확히 사용해야 하는데 상당수의 아나운서가 이를 잘못 사용하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다.

여기서 비근한 예를 몇 개만 들면 불이 난 화재(火災)는 길게 ‘화-재’라 해야 하고 이야기의 제목 ‘화제(話題)’는 짧게 화제라 해야 한다. 그리고 죽은 이를 불살라 장사지내는 ‘화장(化葬)’은 길게 ‘화--장’이라 해야 하고 화장품 따위로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은 짧게 화장이라 발음해야 한다. 이럼에도 길게 발음해야 할 ‘화-장’을 짧게 발음해 얼굴을 찌푸리게 한일이 있었으니 이게 바로 저 2010년 3월 26일에 일어난 끔찍한 천안함 폭침사건이다. 이 사건에 희생된 꽃다운 젊은 간성 46위를 ‘화-장으로 장례를 치를 때 기자나 아나운서들 거개가 길게 장음으로 ’화-장‘이라 해야 될 것을 단음으로 짧게 화장이라 했으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참으로 한심하고 또 한심해 기막히다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기막히고 한심한 일은 2015년 11월 23일에도 일어나 대한민국 전역에 생중계 된 바 있다. 시청자 몇 백만 명이 보고 듣는 가운데 말이다. 그날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 날로 조문을 받는 중이었고 전국에서 조문객이 몰려와 조문 혹은 조사(弔詞)를 했다.

그런데 이날 이나라 아나운서 중에 내로라 하는 원로 아나운서 모 씨가 사회를 보면서 커다란 (아주커다란) 오류를 범했다. 학력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명실공히 이나라 제 1급의 아나운서가 말이다. (계속)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