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동양일보) 소싯적, 마당 구석에 자리 잡은 우물은 손이 많이 가는 아날로그였다. 밧줄에 걸린 두레박을 우물 아래로 내려 물을 길어 올리는 케케묵은 방식이었다. 얼핏 쉬운 것 같지만 한 번의 투척으로 원하는 양의 물을 길어 올리려면 섬세한 요령이 필요했다. 두레박 안으로 양껏 물이 들어가려면 줄을 기술적으로 흔들어 두레박을 비스듬히 누여야 했다. 그런 잔기술이 없으면 빈 두레박을 올리기 십상이었다. 자식들과 달리 어머니의 손기술은 능숙하고 탁월했다. 그렇게 길어 올려진 우물물 등목으로 무더운 여름을 이겨냈으며 식구들의 밥을 했고 빨래를 했다. 물값은 거저였으며 맛은 늘 청량했다.

조국 근대화의 첨병은 뭐라 해도 수돗물이었다. 변변찮은 두레박 대신 야무지게 생긴 꼭지를 틀면 물이 사시사철 쏟아져 나왔다. 우물처럼 요령도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우물물과는 달리 물맛은 무미했으며 탁한 소독약 냄새를 품고 있었다. 수돗물의 약 냄새는 정수기라는 문명의 필터를 거쳐 오늘날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물물 맛을 넘어서진 못한다.

공식 명칭, 먹는 샘물이라는 ‘생수’는 봉이 김선달처럼 지천에 널린 물을 용기에 담아 1988년 서울 올림픽 무렵에 공식 판매하기 시작했다. 외국 선수들을 위해 생수 판매를 일시적으로 허용했다가,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근거 법률을 바로 폐지해버렸다. 졸지에 범법자가 된 생수 생산업자들은 생수 판매를 계속 허용해달라며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결국 헌법재판소는 ‘생수 판매 금지 조치는 깨끗한 물을 마실 국민들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생수업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탄생한 법안이 ‘먹는 물 관리법’이다. 생수업자들의 생존권에서 생수 문화가 시작된 것은 다소 희극적이다. 봉이 김선달의 제도권 진입이다. 이렇게 형성된 생수 시장은 작년 8,000억 원을 넘었고 곧 1조 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대형 산업으로 성장했다.

생수에 관해서는 많은 담론들이 존재한다. 그중 대표적 주장은 과학적 성분 분석에 기초해 수돗물이나 생수나 미네랄 함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필수 미네랄까지 제거한 정수기 물보다는 차라리 수돗물을 먹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물의 사용 가치보다 브랜드와 디자인 가치로 평가하는 특권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같은 수원지에서 나오는 생수도 브랜드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생수 자본의 흐름, 기이하고 요상스럽다.

빙하를 녹이고 200m 심층 바다에서 지하수를 뽑아내 생수라고 주장하는 순간, 수돗물과 오래도록 달여 낸 옥수수 차나 보리 차는 졸지에 ‘죽은 물’이 돼버렸다. “생수가 일반 물보다 더 깨끗하니까”라고 믿고 마시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최근 5년 동안 생수업체 62곳 전체의 수질 기준 위반 업체가 총 49곳, 80%에 달한다. 못 믿을 생수이다. 이쯤 되면 나쁜 봉이 김선달이 천지라는 이야기이다.

몇 해 전 국내에 번역 출간된 ‘보틀 마니아’의 저자 엘리자베스 로이트는 “생수는 편리함을 좇는 현대인의 습성과 맞아떨어져 건강에 좋은 물, 안전한 물, 맛있는 물이라는 현혹적인 마케팅과 눈길 끄는 디자인으로 대중의 욕망을 건드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라고 일갈했다. 생수 1ℓ를 만드는 것이 같은 양의 수돗물을 생산할 때보다 600배에 달하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알려져 있다. 환경단체들이 생수산업에 반기를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줄리아 로버츠가 애용한다 해서 '스타의 물'로 알려진 '피지 생수'가 비싼 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물류비용 때문이다. 남태평양 피지 지하 암반에서 뽑아내 암반수를 한반도까지 공수하려니, ℓ당 1 만원이 넘을 수밖에. 이 고매하신 물은 얼마 전 서울시내 유명 백화점 명절 선물 리스트에도 그 이름을 올렸다. 요지경이다.

 

그다지 몸에 좋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지구에 유익하지도 않지만, 생수는 이제 일상에서 필수품이 된지 오래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에 대해, 생수나 수돗물 모두, 그 수원지가 어디인지, 성분은 무엇인지, 그 물을 마시는 것이 평등사회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아야 한다. 돈이 없어도 누구나 깨끗한 물을 싼값에 마실 수 있어야 한다. 못 믿을 생수라 오늘도 난 보리차 물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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